분노의 도로 끝에는 집이 있다,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4
삼월
/ 2017-12-18
/ 조회 2,612
관련링크
본문
어디로 가야 하나?
더 나은 삶을 찾아 폐허를 헤매는
우리 최초의 인류
-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중에서
1. 독재자는 폭력으로 통치하지 않는다
독재자는 폭력으로 통치하는 사람이 아니다. 독재자는 자원을 알아보고, 효율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독재자 임모탄이 그런 사람이다. 임모탄이 연설을 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든다. 대야나 양동이 같은 걸 손에 들거나 머리에 인 채로 말이다. 연설이 시작되는 순간 사람들은 기대와 흥분으로 어쩔 줄 몰라 한다. 임모탄의 연설이 주는 감동 때문이 아니다. 그 순간 열린 수문 아래로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가 반가워서다.
물줄기 아래서 열광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임모탄은 지배자의 기분을 만끽한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이 연설을 하기 전에 빵을 수레에 담아 와서 던져주었던 모습과 흡사하다. 굶주린 로마의 시민들에게 황제의 연설이 곧 빵이었던 것처럼, 사막 한가운데 있는 시타델의 사람들에게 임모탄의 연설은 곧 물이다. 이 빵과 물은 친절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집집마다 배달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한 사람씩 차례로 받을 수 있도록 질서 있게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빵은 공중에 흩뿌려져 아우성치며 손을 뻗지 않으면 받아먹을 수 없다. 물줄기 또한 수문이 열림과 동시에 콸콸 쏟아져 내리기 때문에 들고 있는 양동이를 다급하게 들이밀어야 약간의 물이라도 얻을 수 있다. 그마저도 대부분의 물은 마른 땅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는 독재자들은 어째서 빵과 물을 나눠줄 때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일까? 독재자들에게 자원의 이용 목적은 권위를 극대화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자원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공평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공중에 던진 빵을 아우성치며 받아야 하는 동안, 순식간에 쏟아지는 물줄기를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서로 밀치는 매순간에 시민들은 피통치자로서의 신분을 깊이 자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통치할 수 없으며, 스스로에게 권력이 없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통치능력이나 권력이 없는 게 아니라 단지 자원이 없을 뿐이다.
2. 여자는 아이 낳는 기계, 남자는 병사
독재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믿게 만드는 이유는, 그 사람들 역시 자원화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자원이다. 노동력을 가졌으며, 적과 싸울 수 있고, 또 인간을 생산하는 능력도 가졌다. 시타델의 독재자 임모탄은 그 인간이라는 자원을 소유하고, 이용한다. 특히 여자는 아이 낳는 기계로 이용하고, 남자는 병사로 이용한다. 그 쓰임새가 소름끼칠 만큼 극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를 통틀어 모든 국가가 국민이라는 자원을 이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인구를 생산하는 여성과 전쟁에 동원되는 남성으로 이용되어왔다.
신체의 결함 등으로 이런 이용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거나, 이용되길 거부하는 자는 모욕이나 비난 혹은 처벌을 받는다. 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그 이용을 거부하는 자들이다. 시타델의 사령관 퓨리오사는 강제로 임모탄의 아이를 낳게 된 젊은 여성들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한다. 화가 난 임모탄이 자신의 병사들과 용병들을 데리고 여성들의 뒤를 쫓는다. 영화의 배경은 22세기 핵전쟁 이후이므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유전질환이나 신체의 기형을 가지고 있다. 임모탄의 병사들도 대부분 병자들인데, 맥스는 이들에게 잡혀와 강제로 피를 뽑히게 된 처지였다. 맥스와 그의 피를 수혈 받은 병사 눅스는 어느새 임모탄을 배신하고 여성들의 탈출을 돕는다.
3. 영웅도 없고, 유토피아도 없다
눅스는 원래 종교에 가까운 신념으로 임모탄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현세의 병든 신체 대신 내세의 구원을 임모탄이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눅스와 병사들은 임모탄의 명령 아래 진격하고,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다. 그러나 임모탄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된 눅스는 여성들 중 하나와 사랑에 빠져 다시 여성들을 위해 싸우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여성들의 신념 역시 종교에 가깝다.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유토피아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어머니의 땅이 늪지대로 변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퓨리오사는 절망한다. 절망 속에서 여성들은 더 먼 길을 떠나려 한다. 그 길은 생존을 기약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일 수도 있다.
고심 끝에 맥스가 이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맥스가 제안하는 길은 시타델로 돌아가는 길이다. 시타델에는 병든 병사들과 굶주린 사람들, 그리고 임모탄이 관리하던 물이 있다. 그러나 시타델로 돌아가려면 도중에 임모탄을 만나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다시 추격전이 시작된다. 영웅은 없다. 맥스도, 퓨리오사도, 눅스도, 여성들도 영웅이 아니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에게 목표는 생존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한다. 미친 자의 생존방식은 생존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서 형성된다.
4. 도주가 아닌 탈주
집을 떠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많다. 노라가 그랬고, 델마와 루이스가 그랬다. 새로운 삶을 찾아 집을 떠난 여성들의 삶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노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델마와 루이스는 죽음을 향해 날아오른다. 집을 떠나는 것과 붙잡혀 되돌아가지 않는 것만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는 도주에 가까운 선택이다. 반면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집을 되찾기 위해 돌아간다. 유토피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집을 되찾고, 거기서 살아가야 한다. 집으로 되돌아가 씨앗을 심고 싹이 트길 기다리는 일, 그게 바로 탈주다.
퓨리오사의 어머니 부족들이 녹색의 땅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자신들이 간직해왔던 씨앗을 보여준다. 늙은 여성들은 씨앗을 품고 젊은 여성들과 함께 싸운다. 아이 낳는 기계로 이용되던 여성들이 생명을 이어가는 여성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순간이다. 거기서 탈주는 시작된다. 절대자유와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기파괴적 도주를 멈추고 출구를 찾아 나설 수 있다. 통치하지 못한다는 무력감과 스스로에게 권력이 없다는 착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권력이며, 생존하기 위해 타인과 연대하는 능력이 바로 통치이다. 권력관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이도 없고, 통치할 수 없는 이도 없다. 스스로 출구를 찾지 못하고 탈주의 가능성을 막아버렸을 뿐이다. 더 나은 삶을 찾아 폐허를 헤맬 필요가 없다. 지금 있는 그 곳에서 함께 싸우고, 씨앗을 심고, 싹이 트기를 기다리면 된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올 봄에 텔레비전에서 이 영화를 틀어주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보다가 막 눈물이 나는 거예요. 창피하게.
창피하게 또 그걸 사람들에게 얘기했더니, 도무지 공감불가의 상황.
왜 눈물이 났을까 스스로 궁금해서, 그 봄에 적어두었던 글입니다.
2015년 늦은봄에 이 영화가 개봉했는데,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얼마 뒤에 <우리실험자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무래도 그 봄과 여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이 영화와 모종의 관련이 있었지 싶어요.
늘 '이놈의 더러운 집구석, 내가 나가면 그만이다'라는 마음으로 살았었는데,
이 영화 속 결말이 그때만큼은 제 선택에 아주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요.
여성들의 삶에서 영토화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들을 잊지 않고 가끔이라도 해 보려고,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누군가와 함께 해 보려고 여기에 올려둡니다.
현님의 댓글
현
앗 저도 영화 보다가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인상이 깊었는데,
삼월님 글을 읽다 보니, '도주가 아닌 탈주' 라는 말에 깊이 공감이 되고, 이 부분에서 울컥했습니다. ㅠㅠ
큰 힘을 얻게 되네요.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멋진 영화에 더 멋진 영화평이네요. 눈물로 반응했다는 부분에 공감은 못했지만 ㅎㅎ
이렇게 멋진 문장으로 표현해주니 눈물은 아니지만 뭔가가 꿈틀합니다.
푸코와 들뢰즈를 공부하지 않아도 사막 야생 퓨리오사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공부해야 겨우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저라서, 빡시게 텍스트로 돌진할랍니다.
텍스트에는 유토피아가 없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저에게 해갈을 가져다 줄 물같습니다.
삼월의 영화얘기 계속 듣고 싶습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절망 속에서 여성들은 더 먼 길을 떠나려 한다. 그 길은 생존을 기약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일 수도 있다."
이 문장 왜 이렇게 멋진가요. "절망 속에서 '더 먼 길'을"이라니.
'분노의 도로 끝에는 집이 있다'라는 이 글의 제목과도 잘 어울리는 성찰이 이 안에 묻어 있는 듯도 해요.
길이 없을 때조차, 그 길 끝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때조차 우리는 길을 떠나고 또 더 멀리 바라봐요.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그 '우리'는 말할 테지만,
실은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아버리는 방법이 더 쉽죠.
눈을 감는다는 건 길을 상상하지 않는 것이고, 그건 더 나아가 집을 상상하지 않는 것이기도 할 거예요.
'우리'가 아니면 누구도 지어주지 않고 지켜주지 않을 그 집을요.
집으로 돌아가 다시 집을 지키고 혹은 다시 집을 지어 살아가게 될 그 집이라는 장소는
우리가 처음 떠나왔던 그 집과는 달라져 있을 거예요. 이미 우리가 처음과는 다른 우리가 되어 있을 테니까요.
기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이 되어 있는,
'차연의 운동'에서 빚어진 새 '우리'의 공간 속으로 돌아가는 일이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