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법과 벌에 대하여
삼월
/ 2018-06-01
/ 조회 2,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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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사이에 존재하는 법
사후의 세계는 공포의 시간인 동시에 기대의 시간이기도 하다. 공포와 기대는 늘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호기심 속에서 우리는 사후세계를 상상하고 그려낸다. 물론 상상에는 한계가 있는 법. 그래서 상상 속 사후세계는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 닮아있다. 다만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정의가 사후의 세계에서는 구현되기를 기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정의가 구현되는 과정에서 내가 벌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 역시 떨치기 어렵다. 이 영화 《신과 함께 - 죄와 벌》에도 그 기대와 공포는 잘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 상상으로 빚어낸 사후세계 역시 현실세계와 같은 법칙 아래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 사후세계는 사법과 형벌제도의 도식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와 벌’이라고 붙은 영화의 부제는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명시한다. 죄와 벌은 법을 설명하고, 수식하기 위해 존재한다. 죄가 있어야 법이 있고, 법이 있어야 벌을 내린다. 그런데 언제부터 법은 죄와 벌 사이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죽어서까지도 누군가에게 판결을 받아야한다고 믿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법이 내리는 벌을 당연히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미셸 푸코의 책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은 이런 질문들로 시작되어 끝난다고 볼 수 있다. 이 질문들을 따라 영화 속에 나타난 법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한다.
법은 규율을 실행한다
두꺼운 법전과 셀 수 없이 나열되는 법 조항들을 보면 법이 충분히 체계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법 조항들에 대한 해석에 논쟁의 여지가 많은 것을 보면, 법은 그 자체로 충분히 자의적이며 객관성 또한 결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처럼 법이 의인화되어 나타날수록 그 자의성은 선명해진다. 각 지옥을 관장하는 대왕들은 법을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현실에서도 법은 검사, 변호사, 판사 등 특정한 자격을 가진 이들만이 다룰 수 있게 되어있다. 누구나 입법과 사법을 하고, 징벌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입법과 사법, 형벌제도는 법을 다룰 수 있는 자격을 정해놓았으므로, 법은 특정한 ‘사람’에 의해서 실행된다. 영화 속에서 각 지옥을 관장하는 대왕들이 존재했듯, 현실의 법 역시 특정한 ‘사람’이 관장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옥의 대왕처럼 신의 권능을 빌린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에서는 판사를 향해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고 불러야 하고, 판사의 말에 함부로 대꾸를 하여 신성한 법정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말대꾸가 재판관과 법정에 대한 모독이 되는 일은 이 영화 속에도 등장한다. 나태지옥에 가기 전, 차사는 주인공에게 말대꾸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나태하지 않게 열심히 살았던 이유를 묻는 대왕의 말에 주인공은 돈 때문이라고 답하고, 그 대답은 환생과 형벌을 가르는 말대꾸가 된다. 대왕이 원한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로 태어난 대다수의 인간들은 게을러서도 안 되고, 돈 때문에 부지런히 살아서도 안 된다. 그저 노동자로서의 삶에 순종해야 한다. 그 끔찍한 규율은 지옥의 벌을 내리는 대왕, 법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법은 위법한 자를 골라내려고 있는 게 아니다. 사회의 규율을 어기는 자가 법을 위반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그를 처벌하기 위해 존재한다.
법은 금기를 생산한다
우리는 대개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죄를 처벌하기 위해 법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이때 죄는 법의 존재이유가 된다. 그리고 법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죄를 만들어낸다. 죄 때문에 법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법이 있기 때문에 위법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법은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위법행위들을 미리 예상하고 금기를 마련한다. 금기를 위반한 자는 위법자 혹은 범법자가 되고, 법은 그 금기를 통해 존재를 인정받는다. 금기를 위반하려는 자가 없다면 법은 바로 존재이유를 상실한다. 그래서 법은 적극적으로 금기를 생산한다. 위반이 예상되는 금기, 어떻게 해도 벗어나기 어려운 금기의 존재가 필요해진다.
400여년 만에 나타난 저승세계의 귀인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도 그 금기를 피해갈 수 없다. 애초에 법이라는 금기를 피해 살아가는 일 자체가 가능하지가 않다. 법은 행위 이전의 의도까지도 언제나 심판할 준비가 되어있다. 금기를 피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결국은 늘 금기의 존재를 늘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우리는 법이라는 금기에 의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일의 결과까지도 감내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바로 주인공의 저승길을 어지럽히는 존재인 동생의 죽음 같은 경우다. 저승의 법은 원한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묻지 않는다. 단지 원한을 가진 존재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다시 말해 법은 범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범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법은 스스로를 변형시킨다
저승의 왕 염라에게 망자는 죄인과 마찬가지다. 모든 망자들이 빠져나가기 힘들 정도로 법은 촘촘하게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심판의 마지막 관문에서 망자를 마주한 염라는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 미리 준비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때 차사가 소리친다. ‘대왕님은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염라는 그 말에 당황하지 않는다. 법은 그 법의 적용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단지 금기와 함께 위반의 주체들을 생산해낼 뿐이다. 위반의 사유나 위반하지 않을 가능성 등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가장 크게 법을 위반한 것은 법 자신이었음이 드러난다. 원귀가 되어 소멸될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동생을 도운 것은 다름 아닌 저승의 왕 염라였다. 염라는 왜 그런 친절을 베풀었을까? 법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이는 법 자체, 법을 집행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사법권력은 법을 집행하는 동시에 법의 경계를 무너뜨려서 법을 보완해나간다. 법은 그 확장성을 통해서 생명력을 얻는다. 끊임없는 변형이 곧 법의 생존방식이다. 법의 권위 아래 살아가는 이들이 법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법은 조금씩 융통성을 발휘한다.
우리는 모두 그 넓고 촘촘한 융통성의 그물 아래 포섭되어 있다. 염라가 저승의 규칙을 위반하고 다른 판결을 내리는 것이 가능했던 것처럼, 법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을 변형시킬 수밖에 없다. 법은 정의를 모르며, 정의의 구현에는 관심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해서 법을 향해 말해야 한다. 기대와 공포 속에서 정의로운 판결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법을 향해 열심히 소리치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법은 생존하기 위해 그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법의 권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바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골 사람처럼 죽을 때까지, 아니면 이 영화에서처럼 죽어서까지도 법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우리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