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월강좌] 후기 :: 루쉰과 펑유란의 모색 +4
삼월
/ 2018-02-26
/ 조회 4,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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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1. 중국과 ‘중국’의 관계
이번 강좌에서 먼저 제기된 문제는 중국과 구분되는 ‘중국’이다. 중국은 우리가 아는 국가 중국이지만, ‘중국’은 조금 복잡하다. ‘중국’이란 어떤 문명-세계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중국이라는 국가와 동일하지 않다. 중국과 ‘중국’의 구분은 이번 강좌에서 제기된 중요한 문제이며, 논의를 풀어가는 전제이기도 하다. 더구나 ‘중국’이라는 문명-세계는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유해야할 무엇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중국’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강사인 기픈옹달님은 루쉰과 펑유란이 ‘중국’을 사유한 방식들에 주목한다. 그 사유를 바탕으로 지금 우리가 중국과 ‘중국’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겠다.
근대국가로서의 중국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두 개의 중국 모두 청 왕조의 멸망 이후를 자신들의 시작으로 본다. 그중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우리나라가 맺은 관계는 더욱 오래되지 않았다. 서로를 국가로 인식하고 인정한 시기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짧은 관계와 역사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빠르게 우리의 경제와 삶 속에 침투해 왔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눈여겨보아야 할 중국의 한 가지 변화가 있다. 바로 중국이 ‘중국’을 다시 사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과거 중화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와 반봉건을 내세우며 왕조국가와 단절했었다. 경제규모가 커진 지금은 자신들이 과거 봉건이라 배척했던 유학을 되살리려 한다. ‘중국’으로 상징되는 옛 체제의 부활은 다시 ‘문명세계의 중심’을 자처하기 위한 중국의 움직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 루쉰과 펑류란
그렇다면 ‘중국’은 쉽게 되살릴 수 있는 분명하고 견고한 세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천하의 지배자는 수시로 바뀌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문화들이 녹아들었다. 누구도 ‘중국’의 지배자가 되지 못했으며, ‘중국’의 일부가 될 뿐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은 점점 커져갔지만, 근대에 이르러서는 서구 제국주의의 위협 앞에 무력함을 드러냈다. 루쉰은 청나라 말인 1881년에 태어나 옛 학문을 배우며 자랐지만, 청년기에는 새로운 시대의 학문을 배우러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루쉰은 군중이나 지식인을 비판하면서도, 그 자신 역시 낡은 전통의 유산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으며, 속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루쉰이 말하는 진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파괴하는 전복이며, 파괴해야 할 세계는 개별 인간의 고유함을 억누르는 질서 혹은 체제였다. 루쉰은 ‘중국’이라는 세계의 몰락을 목격하면서 동시에 ‘중국’이라는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루쉰이 지금의 중국을 꿈꾼 것은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보지 못하고 죽은 루쉰은 ‘중국’이라는 문명세계와 현재의 중국 사이를 살았으며,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의 삶으로 미루어보건대, 루쉰이 더 살았더라도 흔쾌히 중국의 일원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루쉰에 비해 펑유란은 1990년까지 살아 지금의 중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펑유란은 근대학문의 체제에서 중국의 사상을 새롭게 정리하고자 했다. 중국철학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펑유란의 《중국철학사》가 등장한 이후이다.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은 중국에도 철학이 있고, ‘중국철학’이라 불릴 만한 사유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루쉰이 전통을 강하게 비판한 것과 달리 펑유란은 공자를 소크라테스에 견주고, 주희를 중국철학의 대표로 내세웠다. 그러나 펑유란이 말하는 중국철학은 현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청나라 말기의 철학 서술에서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펑유란의 시도는 당시 세계의 보편이었던 서구 철학의 언어로 중국철학을 말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물론 이 시도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중국철학이 보편학문의 세계에서 살아남기에는, 중국 내부에서 전통과 단절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3. 중국의 부상과 ‘중국’의 부활
지금 펑유란의 시도는 다른 각도에서 재평가된다. 현재의 중국은 ‘중국’이라는 문명세계를 부활시키려 한다. 공자는 건재하며, 중국인은 어느새 혁명과 유가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보편의 언어로 자신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던 펑유란의 시도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중국은 다시 자신을 보편의 위치에 놓으며,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세계를 자신들의 것으로 취하려 한다. 여기서 이 강의가 제기하는 마지막 문제가 나타난다. ‘중국’은 과연 중국의 것인가? ‘중국’이라는 문명세계를 중국이 자신들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공자는 중국인인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현대의 그리스인들로 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공자는 ‘중국’이라는 문명세계의 일원일 수는 있어도, 중국인은 아니다. ‘중국’이라는 문명세계는 지리적 경계와 상관없이 영향을 주고받던 수많은 문화들의 융합이다. 누구도 ‘중국’의 지배자가 되지 못하고 그 일부에 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중국 역시 ‘중국’의 주인이 아니다. 그러면 이 ‘중국’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과거 루쉰이 ‘중국’의 몰락을 목격하면서 ‘중국’에서 벗어나려 했다면, 우리는 중국의 부상을 목격하면서 ‘중국’을 사유해야 한다. 중국과 ‘중국’은 구분해서 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절대 따로 떨어트려서 볼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댓글목록
김현님의 댓글
김현
강의를 듣고, 또 질의 응답 시간을 가지면서
저는 오리엔탈리즘 세미나를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저도 중국에 대해서 패권적인? 일률적인 룰(?) 같은 것을
적용해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동양' 처럼 '중국'도 하나의 추상적인 단어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펑유란이 자신들에게는 '민주와 과학이 없다는 생각',
그리고 또 '서양에게 우리에게도 독립적인 철학 전통이 있다는 것을 항변하고 싶었다'는
여러 문제 의식을 가지고 중국철학사를 쓰게 되었다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강의 너무 재미있었고, 듣고서는 중국어를 배워야 하는 게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기도...ㅎㅎ
후기 잘 읽었습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동양'은 잘 모르지만 ;;;
'중국'은 추상적인 개념이되 '동양' 보다는 구체성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中'은 문명의 내부를 가리키는 말이며,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사실 이보다 '國'이라는 개념이 더 재미있는데, 이는 통치(治)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표현으로는 '野'가 있어요.
체계적이고 분명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밝고 선명한 공간이 '중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외부세계, 서양을 통해 붕괴되는 경험이 19세기 ~ 20세기 중반까지의 경험이었어요.
중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면 더 분명하게 잡힐듯 한데... 시간과 힘이 딸려 접어두고 있습니다. ^^;;
재미있게 들으셨다니 다행이어요.
게다가 멋진 후기가 있어 그 시간이 더 잘 갈무리되네요~
김현님의 댓글
김현
저도 동양 보다는 중국이 조금 더 구체성을 가지는 말이 아닐까 싶기는 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말씀하신 것처럼, 중국에 대해 생각보다 잘 모르고 혹은 생각보다 더 모르는 그 이유 때문인지
중국이란 말이 조금 덜 직관적으로 닿게 되는 것 같아요. 어렵습니다. ^_ㅠ...
그래서 강의록에서 있는, 중원, 천하, 이런 말들 많이 들어왔으면서도, 뜻은 이번에 처음 알고 놀랐습니다..
알아볼 생각을 안 한 스스로에게도 놀랐고요;;
저는 중국에 대해서 너무 모르지만, 이번 강의에 등장했던 조경란도 궁금해집니다.
논리를 압도하는 현실, 무얼까요...
여튼 중국철학사도 기대합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장자, 노자, 공자, 맹자, 그리고 사기를 낳은 철학의 공간으로서 '중국'은 무엇이며,
이들 철학의 근본텍스트로서 '중국철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음을 갖게 하는 강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