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이유: 푸코 오픈강좌(0616) 후기 +6
삼월
/ 2018-06-23
/ 조회 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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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른다는 사실의 중요성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혹은 알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배우거나 알게 됨 자체가 중요하지, 무엇을 몰랐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이런 공부는 지식의 흡수와 축적 혹은 체계화를 목표로 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보는 공부는 이와 다르다. 우선 공부의 시작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내가 무엇을 몰랐는지를 알게 됨으로서 오는 변화, 그게 바로 철학이다. 푸코에게 모든 것은 하나도 당연하지 않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만드는 모든 이론과 지식은 ‘자연에 대한 해석의 독점’이다. 이 독점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한다.
지식을 흡수·축적하여 체계화하는 공부가 해석의 독점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 당연한 것이 없음을 아는 일은 스스로가 흡수·축적하고 체계화한 지식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일이다.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이 당연하지 않음을 매순간 다시 깨닫는 일이다. 그러니 공부란 누군가를 존경하고 따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가르친 선생님을 부정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인물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내가 흡수·축적하고 체계화한 지식의 절대성에 대한 부정이다. 니체는 19세기에 이미 이 지식의 절대성을 부정했다. 균형 잡힌 견해란 없으며, 내가 만든 보편적 프레임이 나의 권력 정당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다. 20세기 철학자 푸코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2. 권력, 타인과 맺는 관계
1984년 푸코가 죽은 해에 발표된 논문인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푸코의 지적 유언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논문에서 푸코는 자신의 연구를 각각 지식, 권력, 윤리라고 부를 수 있는 세 가지 시기와 경향으로 분류했다. 지식, 권력, 윤리는 모두 자기와 맺는 관계를 기준으로 삼는다. 푸코의 초기 연구테마인 지식은 자기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중심으로 하며, 권력은 타인과의 관계, 윤리는 자기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한다. 푸코가 지식이 자연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여 권력을 정당화한다고 말할 때, 지식은 권력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지식이 권력의 발판이나 도구가 되는 게 아니라, 지식 자체가 권력 정당화 방식이다. 그렇다고 권력이 타인을 억압하기만 하는 혐오스러운 무엇이라 여길 수만도 없다. 푸코에게 권력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행사되는 것이다. 자기가 타인과 맺는 관계가 곧 권력이고,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는 권력관계이다.
지식이 권력 정당화 문제와 연결되니 지식이나 공부를 배척하자는 식으로는 이 권력관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권력의 담지자로서 개인이 판단력을 기르지 않으면, 개인은 쉽게 담론의 보편성과 정상성을 신봉하게 된다. 공부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공부 자체를 다시 사유하고 재정립하는 일이 필요해진다. 철학의 한계와 ‘공부하지 않을 능력의 상실’에 대한 알랭 바디우의 성찰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바디우에게 진리는 언제나 ‘도래할 것’이며, 철학이 진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는 ‘사건과 마주하는 하나의 작용’이며, 사건과 진리는 주체의 실천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킨다.
3. 지혜를 사랑하는 일
이제 공부는 지식의 흡수·축적과 체계화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력의 문제가 된다. 공부는 매순간 판단과 검토를 거쳐야 한다. 공부한 내용을 검토하는 일은 물론 전에 알던 내용 역시 매순간 판단과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지는 것을 알아야 하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공부가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나 자신의 도덕적 강박을 강화하는 일로 연결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이런 성찰을 통해 학문을 다시 정의내릴 수 있다. 학문은 내가 배우는 것과 나의 일상생활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정립하는 작업이다. Philosophy가 철학哲學(배움을 밝힌다)이라는 한자어로 쓰이게 된 것은 단지 이 말이 일본에서 먼저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학문은 근대일본의 메이지효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보기 위해 Philosophy를 다시 번역해본다면, 아마 애지愛智(지혜를 사랑한다)라는 표현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
지혜를 사랑하는 일은 ‘진리의 불가능성’을 이해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진리가 ‘진리의 불가능성’을 감추는 장치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철학사를 ‘각각의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본 관점들의 역사’로 다시 이해해야 하며, 그 안에서 보편성을 찾는 대신 우리의 판단력을 길러야 한다. 푸코에게 적은 보편성과 정상성이었다. 푸코는 절대주의에 맞서는 상대주의를 주장한 게 아니라, 절대/상대의 이분법을 파괴하고 넘어서려고 했다. 푸코가 이해한 세계는 질서/무질서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무수한 ‘질서들’로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정상/비정상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수한 ‘정상들’이 존재한다. 한 정상이나 질서가 지배적인 정상과 질서가 되어 다른 정상과 질서들을 소수적으로 만들 뿐이다.
그러면 그 권력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지배해야 할까? 이렇게 권력에 대한 푸코의 탐구는 후기의 윤리 문제로 옮겨간다. 철학은 자기교정이 아니며, 푸코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서 소환해 다시 강조하는 윤리는 ‘자기 형성’의 문제에 가깝다. 우리는 타인과 관계 맺고, 자기를 형성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아무도 그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알아서 해야 한다. 스스로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 그러면 이제 스스로 알아서 하기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하자.
* 이 후기는 푸코를 공부한 허경샘의 강의를 듣고, 나 삼월이 남기는 이야기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아... 말잇못 후기.... 감사합니다 삼월님 ㅠㅠ
모른다! 알아서! 만 기억하고 지나갈뻔 한 것을 이렇게 유려한 문장들로 정리해주셨네요.
푸코를 공부한 허경쌤의 강의를 들은 삼월의 후기를 읽은 아라차는 잠시 묵언수행.....
삼월님의 댓글
삼월
늘 몸둘 바를 모르겠는 칭찬.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듣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지금껏 푸코를 읽어온 것이 헛되지는 않았다며 안도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다시 새로 시작되는 것인가, 싶기도 했지요. 가뿐하게 다시 시작하는 기분입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저야 푸코 공부는 오래전에 손에서 놓았지만...
최근 플라톤의 글을 읽었는데 비슷한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지無知에서 애지愛知로의 전환, 그리고 이를 추구하는 방식으로서의 학문...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하나 덧붙이면 철학哲學의 '철哲'은 '밝힌다'는 뜻으로 쓰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단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찾아보아야겠지만 아마 '철인지학哲人之學’을 줄인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철인' 즉 지혜를 갖춘 사람의 학문 혹은 그것을 추구하는 배움이라는 뜻으로 쓰였을 거예요.
삼월님의 댓글
삼월
애지愛知로의 전환에는, 푸코가 초기에 거리를 두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관계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푸코의 후기 관심사인 Ethike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되니까요.
철학이 '자기형성'의 윤리와 연결되려면, 무지보다는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제가 워낙 한문에 까막눈이라 강의 내용을 이해햐지 못했나 봅니다.
저는 '철인지학哲人之學’이라는 표현을 처음 들었는데, (아니면 들었어도 기억을 못 하는 듯)
거기서 다시 '철학'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옹달님의 설명대로라면 '철학'은 이미 Philosophy의 적절한 번역어인 것 같네요.
늘 공부의 효율만 추구하느라 번역된 것만 읽었는데, 요즘 원문의 중요함을 자꾸만 깨닫게 되어
어쩐지 삶이 고달파질 듯 합니다.
좋은 지적과 설명, 감사합니다.
h.k.님의 댓글
h.k.이제 봤네요. 윗글은 대부분 푸코가 아니라 제 생각이네요.
h.k.님의 댓글
h.k.哲學이라는 용어는 니시 아마네(西周)의 1874년 저작 <百一新論>에 처음 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