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아나키즘] 혁명의 미래와 국가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 발제)2020-06-1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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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으로 끝난 모든 주요 혁명은 혁명에 의해서 전복된 국가보다 더 강력한 국가, 애초에 자기네가 섬기려고 했던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자원을 수탈하고 그들을 더 강하게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빚어냈다. 나는 뒤늦게야 그런 진실을 깨달았다.

제임스 C. 스콧,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 머리말 중에서

 

차별과 억압을 견디고 있는 모든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혁명은 언제나 유일한 출구처럼 보인다. 견딜 수 없는 무엇을 필요 이상으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도록 견뎌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분노는 폭발한다. 분노가 폭발하는 방향과 세기는 당사자들도 예측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혁명은 이렇게 예측하기 힘든 소요와 폭동에서 시작된다. 이런 소요와 폭동을 통해 굳건하리라 믿어왔던 구체제의 일부는 사라진다. 권리투쟁의 역사는 합법적 테두리보다 법 밖에서 법의 규정을 뒤흔드는 사건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합의보다는 침탈이나 약탈이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하기에 유용한 방법이 될 때가 많았다.

모든 소요와 폭동이 혁명이 되지는 못한다. 분노의 목소리들이 가닥을 잡고 일정한 성과를 이루었을 때, 우리는 거기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혁명이 이룬 성과는 소요와 폭동의 서사를 장악하고 한데 모아 가다듬는다. 소요와 폭동의 현장에 있었던 개별적인 목소리들은 혁명의 공식적인 목소리에 묻혀버린다. 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에 목적을 잃은, 애초에 목적한 방향조차 없이 움직였던 목소리들은 다시 누군가에게 시혜와 자비를 구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지금껏 그들의 비참함을 외면해왔던 법이, 제도가, 국가가 그들을 긍휼히 여겨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혁명의 성공은 이렇게 법과 제도와 국가의 힘을 강화하면서 마무리된다. 권리를 보장해달라는 소수자들의 요구가 더 많은 인정과 혜택을 요구하면서 종종 더 강한 정부를 지향하게 될 때도 많다. 국가가 혁명의 대상이 될 때조차 국가는 혁명을 통해 무언가를 잃지 않는다. 정부를 구성하는 관료들이 바뀔 수는 있어도 국가는 결국 혁명을 통해 더 강해진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부터 21세기 현재 홍콩의 민주화혁명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흑인시위까지.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부르주아는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고, 왕의 권한이 아닌 국가의 권한을 강화했다. 부르주아 정치체제를 비난하며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레닌이 이끄는 정치적 전위조직은 러시아혁명의 성과를 몰수하고, 혁명을 실제로 수행했던 인민을 다시 피지배계급으로 만들었다. 홍콩의 민주와운동과 이제 막 촉발된 미국의 흑인시위는 한창 진행중이지만, 여기에도 국가의존적 경향은 나타나고 있다. 홍콩의 민주화운동은 중국이라는 국가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다른 정치체제에 대한 선호를 드러내면서 특정 국가를 옹호하고 지지와 인정을 호소하고 있다.

혁명이 차별과 억압을 일거에 없애 주지 못함을 알면서도 우리 삶에서 혁명의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혁명이라는 출구 없이 어떻게 참고 견디라는 말인가. 혁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계속되어야 한다. 스콧의 아나키즘은 이처럼 계속되는 혁명 이후에 오는 일종의 환멸에서 시작된다. 목숨을 걸고 혁명을 이뤄냈는데, 왜 여전히 노예처럼 취급당하고 모멸감과 폭력을 견디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국가가 보장하는 자유와 평등은 언제나 아주 최소한으로 쥐어짜낸 듯이 인색하다. 그렇게 최소한으로만 보장된 자유와 평등은 다시 혁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혁명도 끝나지 않고, 국가 역시 건재하다.

스콧은 혁명에 대한 이런 환멸 속에서 회의에 찬 시선을 국가에 던진다. 1789년은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난 해이기 이전에 미국에서 최초로 대통령이 선출된 해이다.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나면서 새로운 정치체제를 고민했다. 혈통으로 세습되지 않고 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군주가 이렇게 탄생했다. 200년 넘는 시간을 지나면서 대통령제는 이제 선출군주제가 아닌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자리잡았다. 이 민주주의 모범 국가에 흑인대통령은 21세기에 와서야 선출되었고, 여성은 아직 한 번도 선출되지 않았다.

미국의 대규모 흑인시위는 역사 속에 여러 번 등장하지만 폭동이나 약탈로 그 정당성을 의심받을 때가 많았다. 폭동은 견딜 수 없는 감정의 폭발이며 분출구이다. 미국의 흑인들은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선거권이 부여된 후에도 계속된 차별과 혐오의 시선 속에 살아왔다. 백인 경찰이 흑인을 난폭하게 대하며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 역시 무수히 많았다. 폭동을 촉발한 사건은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의 사망이지만, 그 아래에는 오랜 모멸감과 굶주림의 역사가 숨어있다. 현재 전세계를 덮치고 있는 코로나 19로 인한 공포와 경제위기 역시 이 폭동을 부추긴 원인 중 하나이다.

폭동의 피해를 감내해야 하는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내의 다른 유색인종들이다. 경제위기와 전염성 질병의 공포는 혐오를 부추긴다. 흑인들의 분노 속에는 백인들에 대한 증오심 이외에도 자신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일자리와 부를 빼앗은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가 도사리고 있다. 외국인, 이민자,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는 트럼프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2020년에 촉발된 이 시위는 오랜 민주주의의 모범국가 미국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다시 다른 정당의 백인남성이 대통령에 선출되는 훈훈한 결말로 마무리되고 말 것인가.

스콧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이 이름을 숨기고 행하는 일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삶을 유지하고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스콧의 아나키스트식 유연체조는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는 규범을 조금씩 의심해보는 일이다. 여러 사람의 합의로 형성된 규범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기존의 규범이 파괴될 때만 사회가 변화하고 우리 삶도 바뀔 수 있다. 스콧의 아나키즘은 왜 꼭 혁명의 미래가 국가여야 하는지를 묻는다. 법을, 제도를, 국가를 의심하는 일 역시 혁명만큼 중요하다. 그렇게 의심하는 동안에는200년 넘는 시간을 국가에 묶여 충성을 강요당했다고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아나키스트의 기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목숨을 걸고 농경과 노동을 거부하며 끊임없이 달아났던 아나키스트의 후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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