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주권과 순수성 서론, 제1장: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2021-06-0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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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과 순수성: 서론, 120세기의 제국주의와 내셔널리즘]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에레혼

 

겉으로는 순수한 질문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의구심을 갖기에 인간일 수 있다. 말장난스러운 문구는 인간다움의 기준을 이야기할 때 줄곧 소환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질문이 인류 지성사를 발달시켰다는, 그런 케케묵은 이야기. 한편으로는 삐딱한 생각도 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존재론적 질문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았나. 요즘 친구들은 생각하는 게 깊지 않더라는 진심 어린 (하지만 쓸데없는) 어르신들의 걱정이 귓가에 울린다. 인스타그램의 명언 모음 계정, 유튜브발 교양 강의 등은 바쁘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네 스스로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라고 강조한다.

존재에 대한 자문을 강제하는 분위기가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질문 형태를 바꿔보자. ‘나 자신은 누구인가’에서 주어를 복수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 민족은 어디서 연원했나,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하는 식의 질문들. 스스로에 대한 물음을 하지 않는 일은 생각없이 사는 사람 취급 정도로 끝나지만, 겨레와 민족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그때는 사람 취급조차 못 받을 수 있다. 존재론에 대한 집단적 형태의 고민은 숭고한 포장으로 덮여 있다. 그 고민의 이면이 정말 고상한 내용물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혹은 물어보지 못한다.)

 

악마에 맞서다 악마가 된 게 아니라 태생이 악마인 것을

프래신짓트 두아라는 ≪주권과 순수성≫ 앞부분에서 “공동체의 자기이해”(38)가 강조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정체성의 문제는 단지 우리가 어떻게 과거의 우리가 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이익, 현재의 요구 그리고 미래의 전망들과 관련하여 현재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정치와 운명적으로 엮여져 있다. 따라서 누가 우리와 다른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정의하고 대우할 것인가가 민족주의 이념을 구성하는 문제들이다.(38-39) 민족이란 단어에 유구한 내력이 없다는 폭로는 이제 신선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지경이다. 19세기 말에 들어서야 비로소 독일, 미국, 일본의 야욕에 의해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은 확장되었고, 국가와 유착된 형태로 세를 불렸다.(41)

‘내셔널리즘이 첨단화되는’ 분기점은 양차 세계 대전이었다. 민족, 두 글자를 앞세우는 캠페인은 자발적 동원이라는 기적으로 이어졌다. (스스로 나선 사람이 없다할들 이후에 자발적으로 동원되었다며 의미부여하기에도 적합했으리라.) 첨단화되었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이후에 내셔널리즘은 전시 동원과 무관한듯 보이는 상황에서도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했기 때문이다. 민족 캠페인 성공에 감화 받은 20세기 국민국가는 “민족주의 원리”들을 “제국주의적 목적이나 결과로 확장, 전개”하였다.(44) 동일 문명 아래로의 포섭, 사회주의적 박애라는 미명, 민주주의로 바꿔 불렀던 정치체제(45)는 모두 20세기 국민국가가 추악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사용했던 책략에 불과했다.

원류를 파악하기 어려운 20세기 내셔널리즘의 탄생 과정이야 말로 포스트모던 그 자체이다. 어떤 근본 없는 것이 등장해도 놀랍지 않아야 하는데, ≪주권과 순수성≫을 읽는 과정은 헛웃음과 허탈함의 연속이었다. 반제국주의라는 기치를 걸며 민족들을 한데 모으려 했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흐르지는 않았다.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침탈하는 과정은 무력으로, 대놓고 이뤄졌다면, 내셔널리즘을 앞세운 국가들은 민족이라는 갓 나온 발명품을 가지고 공동체를 구성하려 했다. 저자는 같은 듯 다른 현상을 두고 냉소적으로 덧붙인다. 은밀한 제국주의적 의도에만, 혹은 내셔널리즘의 영향을 받은 제국주의가 천명한 개발적 목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도 똑같이 부질없는 일이다. , 구 국가들은 점차 단일 경쟁세계의 영향권 안으로 쓸려 들어갔다.(57)

발제문을 시작하며 나는 누구인가우리는 누구인가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실제로 국가를 유기적 공동체로 인식하는 태도(62)는 낯설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은 유기체인 국가들의 모이면, 이들의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대표자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비록 국제연맹과 같은 제도들이 담론상, 실제상 국가들을 이 체게에 통합, 의존시켜 우선적인 평화의 목표를 실현하는 데 실패했지만, 주권적 정치체의 유일한 기초로서 민족의 우위를, 혹은 그 자연스러움을 증진시켰다. (61) 전후 식민지 처리에 대해 민족자결주의라는 무책임한 대책을 내놓은 윌슨은, 국제연맹이 이하 국가들에게 공인인증마크라도 찍어주는 상위기관인 듯 보이도록 만든 장본인인 셈이다.

 

철저하게 기획된 순수성

'제국주의의 아이디어 제공, 반제국주의적 내셔널리즘의 과감한 실행. 이 단순한 매커니즘은 문화 측면에서도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쉬운 식민 통치와 경제적 수탈을 위해 공법을 전파하고, 국제 단위를 통일하는 과정은 개념어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서구에서 유입된 개념이 일본을 거쳐 조선과 중국 등으로 들어왔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당시 계몽과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은 모든 국가는 근대적 경제, 정치, 군사 구조로 재편성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시간, 공간, 자아에 관한 기초적 인식들도 개조될 필요가 있(65)다고 확신했다. 우리도 서구처럼 될 수 있다는 열망은 국민이니, 신화니, 공용어니 하는 개념이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것과 같은 오인(68)으로 이어졌다.[1] 이처럼 우리나 당연하게 여기고 또 천금같이 여기는 것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파헤칠 뿌리조차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제 저자는 단선 역사의 허위를 파훼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개념들이 으레 그렇듯, 단선성 역시 민족의 순수성―이 단어가 모호하다고 생각되면 진짜 정도의 단어로 치환해서 읽어도 될 듯하다―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이다. 단선적 역사 또한 세계문화와 국민국가 체계의 수출과 함께 지구 전반으로 퍼져나갔으며,(73) 경쟁을 촉구하는 자본주의의 자극은 더욱 자극적인 개념들―유구한 XXX을 무한 생성한다.(74) 순수성은 말 그대로 불후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여전히 모자라다. 국가로서의 순수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한참 더 많은 요소들을 동원해야 한다. (이와 같은 순수성의 논리 쌓기 작업은 마치 토론대회에서 상대방의 공격을 미리 예견하고 반박을 마련하는 태도와 같다. 그래서 역자는 70쪽에 예변적―원문의 표현은 preempting으로 선제적인, 선수치는 정도의 뜻으로도 번역할 수 있음―이라는 표현을 썼는지도 모른다.) 반제국주의적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국가들이 스스로를 순수하다고 인식하는 과정은 문진표 체크와 유사하다. 여성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나요? . 국가의 모든 일원이 자발적으로 복속되기를 받아들였나요? .

지금까지 나열한, 처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든 시도가 우스운가? 프래신짓트 두아라는 만주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가 꺼낸 이야기는 지금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 않기에 뒤통수가 따갑다. 순수성을 억지로 구축하려는 시도는 언젠가 붕괴하기 마련이다. 장태염이 주장했다는 국수國粹라는 단어가 오늘따라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粹는 순수하다, 문화의 정수 따위의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부술 쇄碎라는 글자와도 그 의미가 통한다.



[1] 이런 재의미화(26) 과정이 중국의 특수성과 만나면 오인 효과는 배가된다. 20세기 초반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있었다古已有之’는 식의 태도가 만연했다. 실제로 일본 번역가들이 서구 개념어를 한자로 바꿀 때 참조한 것들은 아예 용례가 없는 신조어보다 고전에서 쓰인 적 있는 단어 조합인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런 한자 번역어가 중국으로 유입되면, 이건 원래 중국에도 있었던 것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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