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마오] 마오쩌둥 1권 혁명을 향한 대장정 2장까지 발제2019-03-27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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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마오쩌둥 1권 2장까지 발제.pdf (156.7KB)

마오쩌둥 1권 혁명을 향한 대장정

2019.03.27 이사랑

#1. 소년 유학자 (1893~1910)

18931226일 마오쩌둥은 후난성에 있는 사오산 마을에서 농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마오쩌둥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했지만 마오의 아버지는 인색한 사람이었다. 훗날의 마오 역시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닮아 있었지만 당시의 마오는 아버지의 인색함에서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아버지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인자한 어머니와 대조되어 더 그렇게 느꼈다.

여섯 살의 마오는 또래 아이들처럼 농사일을 돕기 시작했다.

여덟 살의 마오는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19세기 중국에서 아들의 성공은 곧 아버지의 성공이었고, 교육만이 출세해서 명예와 부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아버지는 마오의 교육에 높은 수업료를 지불했는데, 단지 마오가 집안의 장부를 기록하다 가업을 이어받는 정도를 바랐다. 서당의 교육환경은 열악했고 교육방식은 전통적이었다. 여섯 권의 책(삼자경, 백가성, 천자문, 유학경림, 효경, 소학)을 의미도 모른 채 달달 암기해야 했다. 선생은 2년이 지나자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이 여섯 권의 책과 후에 배운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는 일생 동안 마오에게 사유의 뿌리가 된다.

1906년 마오의 가족은 여섯 명이 되었다. 아버지는 13살의 마오에게 하루 종일 일을 시켰다. 마오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4살의 마오는 부모의 뜻에 따라 네 살 많은 신부를 들이게 된다. 마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집을 나아 친구네서 지냈다. 서양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정관잉의 <성세위언>이라는 책을 읽고 마오는 처음으로 중국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었고 다시 학업을 마음먹었다. 마오는 친척이 운영하는 서당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1910년 봄 창사에서 식량 폭동이 일어났다. 전해 양쯔강의 범람으로 식량난이 시작됐는데 창사에서는 곡식을 빼돌렸고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폭동 이후 청 조정은 순무를 비롯한 고위 관료를 해임시키는 반면 도시의 빈민들은 처형의 형벌을 받았다. 마오는 훗날 이 사건이 전 생애 영향을 끼쳤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이듬해 사오산 마을에서 식량난이 있었을 때 마오의 아버지가 도시로 내다 판 쌀을 굶주린 주민들이 탈취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마오는 마을 사람들의 행동 역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때 쯤 마오는 샹샹현에 있는 현립둥산고등소학교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마오의 학자성을 알아차리고 이후 10년 가까이 마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대주었다. 학교는 신식이었는데 부잣집 아이들 사이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마오는 환영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마오는 공부를 잘했고 교사들의 호감을 샀다. 마오는 역사 과목을 제일 좋아했다. 이때 마오는 일본을 처음 알았고 일본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를 숭배했다.

17살의 마오는 여전히 전제 군주제를 지지했다.

 

#2. 신해혁명 한복판에서 (1911)

마오는 6개월간 후난성의 성도 창사에 있는 중등학교를 다니게 됐다. 창사에서는 식량 폭동 이후 반만주족 정서가 있었다. 마오가 난생 처음 직접 읽은 신문은 <민립보>였는데 창사에 도착한 그 해 봄, 광저우에서 반만주족 봉기가 일어났고 72명의 급진파가 죽었다는 소식을 <민립보>에서 읽었다. 흥분한 마오는 쑨원과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를 국가주요석에 앉히자는 벽보를 써 붙였는데,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캉유웨이, 량치차오와 공화제를 지지하는 쑨원은 방향이 달랐으므로 내용은 엉망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마오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공적으로 표현한 일이었다. 마오는 이제 청나라를 공공연히 비난하게 되었다. 변발에 대한 마오의 태도도 변했다. 둥산학교에 다니던 시절 마오는 변발을 자른 교사를 조롱했으나 창사에서 마오는 변발을 잘라버린다.

4에 후난의 향신층(엘리트들)은 혁명가들 편에 가까웠다. 만주족 왕족으로 내각이 채워졌고, 철도를 국유화한다는 발표 때문이었다. 이는 외국 자본의 도입을 의미했다.

5에 외자 도입이 확정되자 대부분의 학교가 동맹 휴업에 들어갔다. 마오는 공공 집회에 참가했다.

19111013일 금요일, 우창 봉기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후난성 성도와 외부세계를 잇는 통신 수단이 작동 중지 상태였기 때문에 근거 없는 소문만 무성했다.  

16일 월요일에는 은행에서 예금 인출 사태가 벌어졌다. 한커우에서 출발한 일본 기선을 타고 온혁명가들이 성공하고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우창의 혁명파가 파견한 특사 중 한명이 마오가 다니던 학교에 와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 자극 받은 마오는 며칠 뒤 한커우로 가서 혁명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했지만 창사의 급박한 상황때문에 미뤄졌다. 순무는 혁명파가 침투해 있는 대대를 먼 곳으로 이동 배치 시키고 남은 대대는 탄약을 반납할 것을 명했다.

18일 수요일 밤 혁명파는 탄약을 탈환하고 일요일 오전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이는 혁명파의 승리로 이어졌다. 이 당시의 상황을 마오는 극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영국 영사 자일스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어투였다. 자일스는 큰 저항 없이 혁명파가 권력을 잡았고 도시는 금방 질서를 찾았다고 묘사한다.

우창과 창사 두 곳 모두 급진 성향의 하사관과 일반 사병들의 힘으로 봉기가 가능했다. 이제 새로운 혁명 질서를 이끌 사람이 필요했는데, 우창에서는 리위안홍이 도독 자리에 올랐다. 그날 나라 이름을 중화민국이라고 바꾸는 포고령을 냈다. 창사는 지오다펑이 도독으로 올랐으나 9만에 살해당하고 탄옌카이가 새로운 도독으로 취임했다.

11월 초, 곳곳에서 청나라가 반격을 준비하는 조짐이 보였다. 혁명 집단이 완전히 장악한 곳은 네 개 성의 성도 뿐이었다. 황실에 충성하던 군대가 한커우를 공격해서 중국인 거주 구역이 대부분 불탔고 황실 군대가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마오는 계획대로 혁명군 정규군에 들어갔다. 마오가 속한 중대는 법원 내에 주둔했다. 많은 신병들이 문맹이고 하층민 출신이었다. 마오는 당시 지식인의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더럽고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2월 초 두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첫째는 황실 군대가 난징을 포기하고 퇴각한 것, 둘째는 임시 총리대신을 맡고 있던 위안스카이가 우창 지역의 휴전을 승인한것이다. 창사에서는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강제로 변발을 자르는 소동이 또 일어났다.

191211 쑨원이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에 오른다. 하지만 얼마 뒤 위안스카이가국가 수반으로 지명되고 이에 반대하는 군중 집회도 여러 차례 열렸다. 후난이 사람들이 행동을 취하려는 순간 쑨원과 위안스카이는 합의를 이루었고 전쟁은 취소됐다.

1912212,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퇴위했고 이틀 뒤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위해 대총통직을 사임했다. 덩치가 커진 혁명군은 유지비를 감당 못하고 사병들을 제대 시켰다. 봄까지 반년간의 군 생활은 마치고 마오는 학업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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