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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문학] 너절하며 넌더리나는(《에세이즘》 1주차)2024-06-11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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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에세이즘 1주차) 너절하며 넌더리나는.pdf (107.9KB)

너절하며 넌더리나는

에세이즘1주차

에레혼

 

에세이즘을 읽고 든 첫 번째 생각. 에세이의 정의와 본질에 대해서 알고 싶어 이 책을 펼쳤다면, 적절하지 못한 선택이라는 것. 저자는 책의 첫 챕터부터 에세이에 대해 어떠한 옹호도, 혹은 변론이나 성명서를 쓸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33쪽에서 설명하듯 에세이는 태생부터 체계를 거부하는 글이다. 따라서 에세이''에서 공통적 특징을 찾는다 한들 규칙에서 벗어나는 요소가 발견되기 마련이다. 저자는 정의와 규칙화 대신 에세이의 여러 모양을 소개하고 늘어놓는다. 첫 번째 챕터 <에세이와 에세이스트에 대하여>에서 서른 여덟 편/권의 에세이를 나열하는 광기를 보라! 그러나 브라이언 딜런은 이 전시의 주제를 정하지 않는다. 언급된 다양한 에세이의 형태에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에세이즘이 에세이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태도는 솔직하다. 에세이즘은 지나치게 솔직해서 불친절한 책이다.

 

솔직과 불친절. 에세이는 이처럼 공존할 수 없는 듯한 키워드들 사이를 배회하는 장르이다. 태생부터 이 장르는 불분명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에세이 혹은 산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와 소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중간지대를 점해왔다. 시의 세계에서는 운율이 없다고 입장을 거부당하였으며 소설 그룹에서는 허구성이나 서사적 구조의 차이로 인해 배제되었다. 그런가 하면 에세이는 맥락과 무맥락 사이에 있는 글이기도 하다. 혹자는 에세이가 작자의 삶을 진솔하게 전달해주는 글이므로 그의 삶과 문장을 연결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이는 저자의 권위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독서할 수 있는 게 참된 에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양가적 잣대는 우리의 언어 습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저자의 내면과 개인사가 잘 드러난 글을 보면 그 글의 '본령'과 무관하게 훌륭한 에세이라며 추켜세우는 말을 한다. 반면 글의 목적에 맞지 않게 자질구레하게 신변잡기를 드러내는 글을 비난할 때는 "이건 좋은 에세이이긴 하지만" 하는 상투적 문구가 앞선다.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이처럼 중간지대에 주둔하는 장르인 에세이를, 특정 명제에 가두는 일은 학문적 기만 내지는 연구적 필요에 의한 것이다. 브라이언 딜런은 규정할 수 없는 대상(에세이)을 일단 내버려 둔 채로 여러 특성을 시험(essai, 프랑스어로 시도하다)하며, 다양한 잣대에 계측(assaying)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러한 작법은 에세이즘을 문학 비평서이면서 동시에 에세이에 대해 논하는 에세이집이 되도록 만든다.

 

에세이즘에 불만을 제기하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이런 볼멘소리가 터져나올 수 있다. '주제의식과 문장 형식을 통일한다 해서 무조건 훌륭한 저작인가?' 나 역시 이 책이 자질구레하고 잡다하며 단절적인 에세이 작법을 재현했다는 이유로 신선한 저작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에세이즘의 또다른 미덕은 에세이에 대한 색다른 면모를 발굴한다는 데에 있다. <목록에 관하여> 챕터에서 브라이언 딜런은 에세이가 단순히 문장을 수평적으로 산개하는 글이라는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다.

 

에세이는 목록에, 목록의 철저함과 재미에 특별한 끌림을 느끼는 장르인 듯하다. 늘어놓기의 예술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윌리엄 개스의 <나는 목록을 가지고 있다>라는 에세이를 보자. '목록 작성은 문학의 기본 전략이다. 목록은 끊임없이 작성되지만, 목록 작성 자체가 관심을 끄는 것은 특별한 경우뿐이다.' 나는 이 마지막 구절에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지만, 문학 작품에서 목록이 등장할 때 내가 지나치게 첨예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가 겸 비평가 미셸 뷔토르가 1964년 발표한 에세이 <오브제로서의 책>에서 표현한 것처럼,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나 주장이 있는 논의에서 목록이 나타나면 수평적으로 흐르던 텍스트에 갑자기, 거의 폭력적으로 수직성이 들어온다. '단어를 나열한 부분, 수직적 구조인 부분은 문장에서 어떤 성분이든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런 부분의 단어들은 전체 문장에서 어떤 역할이든 (그것이 동일한 역할인 한에서) 할 수 있다.' (36-37)

 

<목록에 관하여> 챕터는 저자가 지리멸렬하게 서른 여덟 편/권의 에세이를 늘어놓은 첫 챕터에 대한 복선 회수이자, 늘어놓는() 방식으로도 수직적인 글을 구상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에세이에 대한 기존의 시각은 어떤가? 만연체 투의 문장을 동원하여 찰나의 순간을 길게 늘여쓰는 글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수평적인 에세이에도 수직적인 순간이 존재하니 그것이 바로 목록에 대한 제시이다. 저자는 나열되는 정보를 읽으며 "두엄더미"를 넘어가는 경험을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등반의 독서는 에세이 속에서는 숨을 고르는, 정지된 시간이다. 독자의 공간에서는 목록 구절을 읽는 데에 물리적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책 속에서 목록의 등장 구절은 정보의 압축이자 서술자가 시간을 버는 부분이기도 하다. 에세이스트는 목록의 더미를 제시하며 글의 리듬을 바꾸고 새로운 리듬감을 조성하기 위해 디딤발을 구르는 셈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이 에세이의 적층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어지는 이야기는 분쇄와 흩어짐에 대한 논의이다. <흩어짐에 대하여>에서 저자는 입자 단위로 나눠져서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에세이의 신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손에 닿은 그것이 빛 알갱이들의 성좌에 둘러싸이면서 에세이가 어떤 것이었는지가 드러난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형식인 줄 알았는데 정해진 경계가 없어서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형식이었던 것. 정해진 형식을 만들지 않으려는 야심을 품은 형식이었던 것. …… 그 글에 생각의 실, 문체의 실, 감정의 실이 아주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은은한 광책을 내길 바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그 작품 안에서 바로 그 순간에 와르르 풀려나길 바란다. 그 글이 누더기가 되길, 짜깁기가 되길, 뒤엉킨 실들의 미로가 되길 바란다. 내가 그렇게 너덜거리는 상태여서인지도 모르겠지만. (51-52)

 

에세이가 힐링 컨텐츠로 자주 언급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글을 쓰는 행위가 스스로를 치료한다는 의학적 근거와 맹목적 추종이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이 떠먹여 주는 인생 통찰과 잠언 구절 수필만이 에세이 출판 시장에서 환영받는 요즘이다. 에세이즘을 읽고 나니 되묻고 싶어진다. 수필이 정말 붓 따르는 대로 쓰면 그만인 글인지. 물론 에세이를 쓰고 수필집을 내는 데에 자격은 없다. 브라이언 딜런의 말처럼, 에세이가 못 다룰 만큼 큰 질문도, 에세이가 못 다룰 만큼 작은 질문도 없으니. 그렇다면, 독자는 에세이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작가의 한 조각이 파편처럼 박힌 글, 내 삶과 동떨어진 누군가의 기록에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배울 점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에세이스트, 그리고 브라이언 딜런은 말한다. 절절한 개개인의 인생이 담긴 글에 대단한 건 없다고. 상당수의 경우 에세이에 담긴 내용, 그리고 그 글이 작성되기까지의 과정은 절절한 고통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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