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된 자유 선택--중국식 통치술의 세련미 에레혼 권위주의와 디지털
기술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유구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권위주의를 감시하는 역할을 할
것인가, 아니면 권위주의의 도구가 될 것인가. 이러한 상투적인
물음은 지리멸렬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과 함께 이 논쟁은 한 쪽의 판정승으로
끝나는 듯하다. 기술과 권력의 친연성을 경계하던 논자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둘의 밀접한 관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말한다. 또한 감염병 유행 상황에서 기술을 동원한 통제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곳으로는 한국과 중국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지목된다. 물론 동아시아 국가의
방역 모델, 그리고 각 국가의 디지털 기술을 통한 감염병 추적 방식을 한 데 묶어서 논할 수는 없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마저도 역학조사 및 자가격리 방식이 이전보다 느슨하게 시행되는 추세이니,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엄격하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제하려고 하는 국가는 지구상에 사실상 중국만 남은 셈이다. 뒤집어 말하면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감염병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국가는 세계에서 중국 뿐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그리고 이 말은 결코 자랑스러운 타이틀은 아닐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면 강도 높은 봉쇄와 격리를 시행한다. 상하이의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상하이에서 밀접접촉자/확진자로 분류되어 자가격리를 시행해야 하는
경우, 격리자의 집 현관문에는 문이 열리면 방역담당자에게 알림이 전달되는 센서가 부착되며, 간이 CCTV도 설치된다. 이러한
시설을 설치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은 무조건 지정된 호텔에서 격리를 시행해야 한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오기 마련이다. ‘중국 사람들은 저걸 다 받아들이고
사나?’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도 분명 있지만, 현지에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며 산다. 중국 사람들이 강도
높은 방역 정책에 반기를 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통제에 반감을
표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중국인들ㅇ이 공산당 독재에 길들여져 비판의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혹은 비판을 하면 당으로부터 해코지를 당할 우려가 있어서? 이러한
분석은 중국의 체제에만 매몰된다면 중국인들의 행동 매커니즘을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된다. 《행복한 감시국가, 중국》은 중국 정치 체제 비판론자들과 다른 관점에서, ‘감시 사회
중국’을 분석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중국인 대다수가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인한 감시(그리고 그로 인한 통제) 보다 디지털 기술이 불러온 편리함과 행복감에
초점을 맞춘다고 설명한다. “기술이 주는 ‘미래상’에 중국 사회의 대다수 국민이 가진 낙관론과, 중국의 ‘외부’에서 제기하는 언론 탄압 및 소수민족 문제의 심각성 사이의 격차는 확실히 커서 우리에게 ‘인지부조화’를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중국의 감시사회, 혹은
감시기술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한 보도나 논의가 적은 상황도 이러한 인지부조화와 관계있지 않을까.” ‘감시기술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한 보도나 논의가 적은 상황.’ 이러한 지적은 중국의 기술 발전을 언급하는 최근
신문의 보도 행태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科技 올림픽’ 내세운 중국, “선수정보 유출”우려도 나와 (조선경제, 2022.02.07)>, <[베이징올림픽] ‘중국이 지켜보고
있다’ 각국 데이터 보안도 비상(스포츠경향, 2022.02.06)>
이러한 신문기사는 ‘중국=감시사회’라는 정보를 보고 싶은 사람들의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중국의 기술력이 발달했다는 정보는 ‘그래봤자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비아냥으로 격하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사자들이 기꺼이 감시받기 원하는 까닭’을 사유하기란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행복한 감시국가, 중국》에서는 이러한 사유를 위해 중국 디지털 기술의 발전 현황에 대해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제2장 중국
IT 기업은 어떻게 데이터를 지배했을까>에서 중국 디지털
기술의 발전상이 잘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서 ‘슈퍼앱’과 ‘긱 이코노미’ 두 키워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슈퍼앱. 중국에서 슈퍼 앱이라고 불릴 수 있는 양대 산맥은 알리페이와 위챗(페이)이다. 이외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중국 어플은 각각의 회사에서
관리하는 어플이거나, 혹은 양대 어플의 결제 시스템을 이용하는 회사이다. 과장을 전혀 보탤 필요 없이, 중국에서 알리페이와 위챗 두 어플만
설치해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이들 어플의 결제 시스템 발전으로 인해 ‘눈먼
돈’은 모두 확인 가능한 돈으로 바뀌었다. 또한 두 어플리케이션은 확장성이 커서 하위 어플리케이션(공식 용어로는 미니 프로그램, 샤오쳥쉬小程序)만 실행하면 굳이 타 회사 어플리케이션을 따로 설치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다. ‘플랫폼 경제’라고도
불리는 긱 이코노미는 중국의 소비 방식과 노동 방식을 모두 바꿔 놓은 현상이다. 음식 배달, 집안 청소, 부동산 중개업, 택시, 화물 운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숙련 노동자의 초단기 노동’은 중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노동
형태이다. 긱 이코노미의 심화는 지나친 노동 유연화로 인해 여타 선진국에서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중국에서는 오히려 빈곤층이 쉽게 돈 버는 플랫폼이 하나 생긴 것으로 취급된다.
또한 책의 설명에 따르면 애초에 중국에서는 유랑민과 같이 노동을 하는 인구가 존재했으며, 긱
이코노미의 발달은 이들이 일하는 방식을 좀 더 효율적으로 변화시켰을 뿐이다. 이러한 키워드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효율성과 편리성이다. 그런데 데이터를 기꺼이 제공하는 것을 통해 행복감을 확보하는
중국 사회의 시스템은 낯선 개념은 아니다. 애초에 4차 산업
사회의 핵심 개념이,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그 역시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것 아니던가. 이 사회에서는 프라이버시의 개념 자체도 이전과 완전히 바뀌게 된다. 문제는, 이와 같은 사회에서 정보 불균형이 일어났을 때이다. 특정 기업이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수집된 정보가 지배층에 의해 다시 관리될 가능성이 있다면? 데이터를 기꺼이 제공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으나, 모든 사람이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는 없는 사회. 바로 중국의 현재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굳이 ‘(정보가 지배층에 의해 관리될) 가능성’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현재 중국에서 개개인의 정보를 가지고 진행하는 통제가 자발적 복종에 의한 방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감시국가, 중국》에서 소개하는 예시는 중국의 사회 신용
점수이다. 이러한 점수는 우리나라 언론 등을 통해서도 자주 언급되었기 때문에 익숙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무단횡단만 해도 사회 신용 점수가 감점되어, 나중에는
일상 생활에 상당한 불이익을 겪는다더라. 이러한 카더라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여기서 주목할 포인트는 신용불량 피행집행인 명단에 따르는 벌이 어디까지나 ‘약한 처벌’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말한 종합격투기 선수 쉬샤오둥의 경우, 고속열차는
탈 수 없지만 불편한대로 일반 열차로 이동할 수는 있다. 다시 말해 이동 금지와 같은 ‘엄한 처벌’이
아니라, 이동할 수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리고 불편한 상태로 ‘약한 처벌’을 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통치 방식은 ‘예상보다 온정적이라’ 문제가 없어 보인다. 책에서는 이러한 통치 수법을 ‘넛지’라는 행동경제학
이론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정부가 할
일은 잘 짜인 제도 설계를 통해 보통 사람이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탈러와 선스타인은 주장한다.” 다시 말해 중국 정부는 자국민이 특정 행동을 하지 않도록 꾸준히 유도하면서 ‘바른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사회 신용 점수가 지금은 직접적인 행동 억압을 위해 사용되고 있지는 않더라도, 프라이버시가 수집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사회. 《행복한 감시국가, 중국》을 보면서, 중국의 통제와 감시에 대해 올바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중국이 기술력을 동원한 통제 및 감시 방식은 과연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형태인가?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대답했다면 다시 다음 질문: 강압적이고
폭압적이지 않은 통제와 감시는 더 위험하지 않은가? 세련된 방식의 통치는 개개인에게 직접적인 해악을
끼치지 않으니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비판적 중국 독해의 걸림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