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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4반세기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20세기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어떤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고, 새로운 문제를 떠안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훗날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시대를 나눌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변화는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는 선명한 구분선을 그어주었을 뿐.
코로나는 하나의 계기로 기억되어야 한다. 기존의 습속을 재검토하는. 일상이 바뀌었고, 관계가 바뀌었다. 개인의 동선, 소비, 구매 등 모든 것이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낡은 주제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다. 586에 대한 비판들, 이른바 민주화 세대에 대한 비판은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은 아닐까. 권위주의 체제에서 벗어났으나 왜 빈부격차는 줄어들지 않는가. 살만한 사회가 되었다고 하지만 어째서 좌절의 늪은 더욱 깊어지고 있는가.
이해해야 할 것과 판단해야 할 것. 이 격동의 시절에 적잖은 사람들이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은 판단이 앞선다.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나쁘니 하는 식으로. 그러나 판단이 어떻든 간에 변화는 폭력적이다. 시대의 조류는 평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해하는 자는 변화를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휩쓸려 사라질 것이다.
중국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판단이 앞서기 때문이다. 최첨단의 IT 기술이 접목된 다양한 사회 시스템, 경제 활동을 이해하기도 전에 중국에 대한 판단이 앞선다. 중국에 무슨 선한 것이 있으리오. 그러나 무시하고 살기란 쉽지 않다. 중국과 얽힌 반만년의 역사가 있고, 앞으로도 반만년 이상 얽히고설키며 살아갈 테다.
중국은 발 빠르게 변화하는 나라다. 이 변화가 판단을 어렵게 한다. 더 문제는 관찰자 역시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찰 대상의 변화도 따라가기 힘든데, 관찰자 자신의 위치도 가늠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민주화'라는 주제가 그렇다. 한국은 87년 이후 민주화를 이룬 나라로 이야기되나, 늘 '실질적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른바 87체제, 직선제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거다.
5장의 표현을 빌리면 '시민'의 등장에 대한 요구라고 하자. '시민', 단순히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주체를 넘어 '깨시민', 즉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주체의 등장을 바랐다. 그러나 그 기획은 늘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탄핵정국을 지나, 대선을 앞둔 시점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더 심각한 상황이라 진단할 수도 있겠다. 왕후이가 이야기한 '탈정치의 시대'를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은 늘 결여된 사회로 이야기된다. 민주와 인권이 없다. 선거도 투표도 여론도 언론도 없다 운운. 실제로 중국에는 서양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시민'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담당자임과 동시에 국가 주권과의 관계에서는 여러 근대적 권리의 주체로서 더욱 추상적이고 인륜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존재'(139쪽)는 여전히 요원하다.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결여되어 있다 하겠다. 이를 보완한 것이 이른바 NGO, 책의 표현을 빌리면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이었다. 실제로 시민사회(단체)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시민사회의 전통이 없는 국가도,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도, 국가가 공공의 모든 문제를 통제할 수는 없는 이상, 시민사회의 존재가 현실적으로 가능해진다'(142쪽)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결국 '당에 의한 정치'로 귀결되어 버리고 만다. 이를 일당독재, 혹은 공산당의 폭압적 권력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여기에는 '공公'에 대한 또 다른 이해가 있다. 여기서 다시 소환되는 것이 바로 미조구찌 유조의 논의이다. 천리天理로서의 공을 실현해야 한다는 당위, 따라서 사私를 부정하는 전통은 개체를 긍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서구식의 '개인'의 존재 유무보다는 사회 구성원이 사회와 맺는 관계이다. 오카모토 다카시는 "서양식 지배의 특징을 '군주와 백성이 일체화한다'는 점에서 찾고 아시아에는 군주와 백성이 서양 사회와 같이 일체가 되는 구조가 없었으며 그러한 통치체제도 잘 형성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155쪽) 그럼 어떻게? 사익을 부정하며 국가를 통해, 즉 "중국공산당이야 말로 민의라는 '천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존재란, 유교적 도덕과 통하는 통치관이 자리잡고 있다"(151쪽)라고 할 수 있다.
국가를 통해 실현되는 정의, 혹은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라는 오랜 유가적 사고가 중국의 독특한 정치 구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한쪽에서는 이를 '봉건적 사고', 즉 떼어내지 못하고 불살라 버리지 못한 낡은 전근대적 습속이라 평가할 테다. 한쪽에서는 이를 아시아의 특수한 구조, 아시아적 특수성이라 이야기할 테다.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문제의식이야 말로 20세기적, 어떻게 보면 19세기적 충격이 낳은 20세기의 과제를 여전히 붙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다.
동양 봉건사회의 반대쪽에는 서구 문명사회가 있다. 진보의 도식, 서구 문명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조바심에 채찍질한 것이 20세기 역사였다. 서양은 미래였다. 말 그대로 '미-래', 아직 도래(來)하지 않았을(未)뿐 아니라 앞으로도 도래할 날이 난망한. 최근 일부 저자들이 '추월의 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나름 절묘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미래'가 도래하지 않았으나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상황. 역설적 추월의 상태.
차근차근 역사의 계단을 밟아가야 한다는 선형적 발전론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이런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중국계 미국 SF작가 켄 리우의 <파(波)>는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지구를 떠나 새로운 별에 정착하기 위해 떠나는 인류. 수 세대를 지나 그 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자신들을 앞질러 별에 도착한 신인류였다. 그들은 '뒤늦게' 출발했으나 '먼저' 도착했다. "'저희는 여러분이 출발하고 나서 한참 후에 지구를 떠났습니다만, 속도가 더 빠르다 보니 이곳으로 오는 중인 여러분을 몇 세기 앞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여러분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종이동물원 350쪽>
기술을 둘러싼, 특히 감시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기술은 이미 비슷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적어도 디지털 감시사회의 모습에서 중국은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전철을 똑같이 밟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동일한 변화 속에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먼저 파고에 올랐을 뿐. 따라서 중요한 것은 변화의 양상이지 변화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변화는 도래할 것이고, 이미 도래하고 있다.
이 변화는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되묻는다. 아니, 국가와 시민이라는 도식 자체가 문제 있는 것은 아닐까. '생민生民'이라는 낡은 표현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중국이 '천리-공'이라는 사유에서 국가를 상상한다면, 민주-인권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쓸데없는 공염불일 테다. 아니, '부재'라는 말 자체도 문제 삼을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으로 부강·민주·문명·화합·자유·평등·공정·법치·애국·경업敬业·성신诚信·우선友善 12가지를 꼽았다. '부강'과 '민주'를 함께 언급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다음 말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배경이 되는 '경제적 평등화'를 요구하는 사상은, '민의'를 전통적인 '천리' 혹은 '천하' 등의 개념으로 대신한, 말하자면 '민주'에 대한 중국의 독자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점이다."(157쪽)
저들은 그렇게 민주, 자유, 평등 등을 추구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수 있는 것은 경업, 성신, 우선과 같은 덕목이다. 이 말들에서 오래된 냄새가 풍긴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옛 글들을 뒤져야 할 것이다. 공맹의 글은 이렇게 여전히 유효하다.
문득, 중국 사회에 흐르는 '온정주의' 역시 같은 전통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든다. 한편 저자가 경험한 '보이지 않는 검열(129쪽)'도 같은 맥락 아닐까? 검열=공포정치라고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드러내야 할 일을 왜 저들은 드러내지 않고 있을까. '천리-공'을 확인하는 자리로 인터넷 공간을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단순히 '사'를 제거하는 것이 목표라면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하다. 검열을 규율의 도구로 이용하는가 질문 역시 유효하다. 여기서 '존천리거인욕尊天理去人欲'이라는 유가의 지향을 들먹이는 것은 불필요하게 과한 해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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