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Ⅲ 너에게는 실재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카를로 로벨리의 인도에 따라 양자역학에 관한 여러 해석을 거쳐 우리는 ‘관계론적 해석’에까지 이르렀다. 양자역학은 초창기부터 관찰의 문제로 과학자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세계를 대상이자 객체로, 그 세계를 인식하고 실험하는 ‘나’를 관찰자이자 주체로 상정하는 일은 이전에나 가능했지, 양자역학 이후에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세계 안에서 주체와 객체는 따로 있지 않으며, 주체와 객체도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과학자도 측정 장비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라는 아이디어는 양자역학 해석을 통해 세계를 다르게 보도록 만들었다. 양자론의 ‘관계론적’ 해석은 대상이 우리(관찰자)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기술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물리적 대상이 다른 임의의 물리적 대상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기술할 뿐이다. 이 해석에서 주체 혹은 관찰자가 객체와 대상에 대해 갖는 우월한 지위와 특권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핵심은 상호작용이다. 물리계 안의 모든 존재는 고립된 대상이 아니며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대상은 상호작용하는 방식 그 자체로 존재한다.(97쪽) 나아가 카를로 로벨리는 상호작용하지 않는 대상은 우리와 무관하다고까지 주장한다. 우리와 상호작용하지 않는 그 대상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그 점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카를로 로벨리는 아주 의도적으로 물리계를 상호작용하는 물질들의 네트워크로 한정한다.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역학이 ‘물리적 실재의 근본적인 보편적 문법’이라고 주장한다.(99쪽) 이 문법은 물리계 안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기초가 된다. ‘관찰’이라는 단어를 ‘상호작용’으로 바꾸면 더 이상 일방적인 관찰이 아니다. 양자론은 사물이 서로 관찰하며 서로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다. 결국은 양자론이 관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므로 카를로 로벨리는 상호작용하는 물질만을 물리계의 대상으로 한정하여 취급한다. 카를로 로벨리는 사물의 속성 역시 상호작용 안에서만 나타난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와 상호작용하지 않는 사물의 속성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사물의 속성은 그 사물이 상호작용하는 방식,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 역시 양자론이 상호작용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로벨리는 양자론이 물리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이라 말하지만, 한편으로 양자론으로 설명 가능한 세계만을 이야기한다. 로벨리에게 세계 안의 모든 존재는 서로 상대적일 뿐 확정되고 독립된 속성을 갖지 않는다.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일시적이고 불연속적인 사건들과 상호작용할 뿐이다. 그의 비판 대상인 세계가 견고하고 연속적이라고 본 철학자들의 주장을 단순히 뒤집었다는 점에서 두 주장은 닮았다. 세계가 ‘진리’와 ‘본질’로 이루어졌다는 말과 물리계가 관계와 사건으로 움직이는 투명하고 순수한 물질들의 집합이라는 말은 어딘가 비슷하지 않은가. 로벨리는 지난 장에서 소개한 양자론의 다른 해석인 다세계 해석과 숨은 변수 해석을 끌어와 다시 비판한다. 다세계 해석과 숨은 변수 해석이 우리와 만나지 않는 다른 세계를 끌어들여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을 해소하고 고전역학의 ‘충만함’을 되찾으려 한다는 비판이다. 그에 비해 ‘관계론적 해석’은 세계에 대한 빈약한 기술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전체 세계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주장이다. (109 ~ 110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지난 장에서 품었던 의문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로벨리는 다세계 해석과 숨은 변수 해석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으며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또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을 해소하고 고전역학의 충만함을 되찾으려 한다는 비판은 다분히 감정 섞인 비난이었다는 점도 깨달았다. 오히려 로벨리가 세계를 양자역학으로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한정하려 함을 이 장에서 여러 번 느꼈기 때문이다. 로벨리는 양자론이 이 세계를 기술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이론임을 여러 번 주장해 왔다. 적어도 이 주장이 맞으려면 과학이론으로 세계를 기술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말까지는 일단 접어두겠다. 양자론의 ‘관계론적 해석’은 주체나 관찰자의 특권적 지위를 없애버렸는데, 로벨리는 상호작용 자체를 강조하면서 각 관계를 개별 관점으로 확장한다. 여기서 ‘내가’ 맺는 관계의 특수한 관점은 다시 과장된 주체 혹은 자아로 회귀한다. 양자론에 대한 로벨리의 신념은 그 자체로 논리가 아닌 믿음이다. 이미 양자론, 혹은 ‘관계론적 해석’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로벨리의 주장대로 ‘과학적 사고는 이미 얻은 확실한 사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94쪽) 중요한 것은 과학을 대하는 태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로벨리의 말대로 과학적 사고의 힘이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시 시작하는 능력이며, 세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면 말이다.
나는 이 장에서 로벨리를 포함한 과학자들이 처한 한계지점, 혹은 두려움을 느꼈다. 암흑물질(찬다 프레스드코드와인스타인의 지적처럼 이 명칭은 적절하지 않겠지만)처럼 세계와 상호작용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무시할 수도, 함부로 예측할 수도 없는 존재의 가능성을 알아차렸을 때, 세계를 파악하고 설명하겠다는 이들은 쉽게 좌절한다. 그런데 이때야말로 용기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세계를 근본적으로 재창안하는 용기’가.(9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