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모두를 무덤 아래 묻고서 에레혼 『루쉰의 인상』을 읽으며 루쉰의 정체성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저자가 '내가 본 루쉰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만큼, 루쉰을 어떤 인물로 규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자연스레 쟁점이 되었다. 루쉰의 정체성에 대해 다른 이에게 묻는다면 답변자의 숫자 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누군가는 소설가로서의 루쉰을 강조할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상가로서의 루쉰을 강조할 테고…… 세미나를 열며 쓴 발제문에 'n개의 루쉰'이라는 제목을 붙인 데에도 이런 생각이 반영되었다. 루쉰을 어떻게 규정하든, 그가 명성을 떨치게 된 시작점이 「광인일기」 발표라는 사실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사상가‧교육자‧문필가‧혁명가‧예술가 등 다양한 방면에 깊은 족적을 남긴 루쉰이지만, 그의 신분을 규정하는 가장 진한 테두리는 소설가이다. 루쉰 스스로가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는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적어도 자신을 '계몽소설가/계몽문학가'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몇몇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은 호메로스 서사시 등장 이래로 위대한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이를 단순히 시詩로써 대하지 않았다. 이들은 문학을 통해 자신의 인생과 교감하였다. 이 과정에서 삶의 양면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더욱 완전한 인생상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는 계기가 형성된다. 이 효과는 문학의 교훈적인 의의를 의미하는데, 문학은 교훈을 제공함으로써 인생에 도움을 준다. 또한 이는 평범한 교훈이 아니라 자각과 용기, 발전와 정진을 수반한다. 문학은 실로 이러한 효과들을 보여주었다. 흔들리고 또 쇠락한 대다수 국가들의 징조는 이러한 교훈에 귀 기울이지 않는 데에 있었다. _루쉰, 「악마파 시의 힘에 대하여」, 1907년 물론 소설을 쓰고 나서부터는 아무래도 얼마간 나 자신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를테면 '무엇을 위해' 소설을 쓰는가? 나는 10여 년 전에 '계몽주의'를 품었기에 반드시 '인생을 위해서'여야만 했고, 그 밖에도 인생을 개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소설이 예전에 '한가로이 읽는 책'이라 불렸던 사실을 싫어한다. 또한 '예술을 위한 예술'은 단지 '여가 시간 때우기'의 새로운 별칭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나는 병든 사회 속 불행한 이를 소설의 소재로 선택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소재를 사용하는 의도는 병증의 고통을 드러내고, 이를 치료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함이었다. _루쉰,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 1933년 (『루쉰의 인상』 257페이지에서 일부 발췌) 「악마파 시의 힘에 대하여」는 루쉰이 중국에서 막 문필 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에 쓴 글이며,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는 만년에 쓴 글이다. 두 글은 약 30년의 차이를 두고 발표된 글임에도 같은 주제 의식을 공유한다. 루쉰은 문학, 특히 소설을 통해 국민을 개조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이 신념이 위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사상적 일관성이 더욱 의미심장한 까닭은, (마스다 와타루의 지적대로) 그의 소설가로서의 활동이 중도에 정지되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계몽 소설의 영향력을 중시했던 루쉰이 끝까지 소설가로 남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해볼 수 있다. 루쉰이 소설을 '절필'한 이유로 가장 많이 지목되는 사건은 1926년의 3.18 참사, 1927년의 4.12 상하이 쿠데타이다. 1926년의 사건은 루쉰이 베이징을 떠나는 직접적인 계기이기도 한데, 3.18 당시 사건에서는 군벌 정부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학생들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루쉰은 이 사건의 출발 지점이라 할 수 있는 베이징 여자 사범대학 사건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다. 1927년 상하이에서 일어난 사건은 장제스 주도 하에 일어난 공산당 및 좌파 축출이었다. 이 과정에서도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글이 무력 앞에 좌절되는 상황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심지어 자신의 독려로 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든 청년들이 희생되는 모습. 이 점에 주목하면 반복되는 좌절이 그를 자연스레 현실에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소리를 내는 글(칼럼, 잡문 등)에 대한 천착으로 이끌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해석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루쉰이 이전 『납함』이나 『방황』 등 리얼리즘적 색채가 강한 문학 작품만을 창작하다가, 그의 인생 후반기에 『고사신편』과 같은 허구성 짙은 작품을 발표한 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혹은 그의 후반기 저술 작업에서 배출된 문장들의 필치가 기존의 비소설-산문을 쓰는 작가와 달랐다는 점 역시 "루쉰의 변화를 과연 변화라고 볼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유발한다. 전자의 질문은 루쉰이 소설 쓰기를 그만둔 게 아니라는 지적이며, 후자는 루쉰의 잡문 역시 소설의 연장선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루쉰의 소설 절필에 대해 왈가왈부 다양한 말이 많은 이유는, 그가 직접적으로 문학 작품을 열성적으로 창작하지 않게 된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사신편』의 경우에도 소설집 출간 시기가 루쉰 사망 1년 전인 1935년이지만, 개별 작품은 1920년대부터 완성되고 있었다.) 결국 현실 정치에 느낀 패배감이나 절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문제라고 지적하는 입장 모두 그럴듯한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확실한 점은 루쉰이 단 한 순간도 소설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쉰은 1902년 일본 유학 첫해부터 량치차오의 계몽소설론을 접하고, 그 내용에 크게 감화되었다.(본문 167쪽) 루쉰이 접한 량치차오의 글 「소설과 정치의 관계를 논함」은, 소설이 고대 사회의 경서가 담당하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는 포부를 담고 있다. 현실은 왕왕 이론을 압도한다. 게다가 그 현실이 중국이라면, 때로는 이론이 현실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로 끌려다닌다. 소설로 민중을 계몽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혁명과 전쟁이 지속되는 20세기 초반 중국 사회에 '순한 맛'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루쉰이 스스로를 계몽소설가-계몽운동가로 지칭했다 한들, 그의 일장 연설이 설 자리는 중국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루쉰이 늘 중국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글을 썼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청년들에게 꼰대스러운 소리를 하는 선배 문인으로 남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소설가 루쉰의 모습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그의 작품 단편 희곡 「길손」이 떠오른다. 그는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무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중간물이었다. 루쉰의 소설 창작 실천은 자신을 완전히 버림으로써 완성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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