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3부 시간의 원천 이 책의 저자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리적 세계에서는 우리가 아는 시간이 하나의 특수한 변수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시간은 다른 변수들에 앞서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변수들과 동등하다. 시간과 공간이 과거의 물리학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 변수들이었다면, 이제 시간은 그 특권적 지위를 상실한다. 절대적 시간의 개념은 이렇게 부정된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감각한다. 시계가 없어도 우리는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짐을 느낀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끼게 할까? 로벨리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마블유니버스의 《닥터 스트레인지》가 떠올랐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자신의 몸을 치료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네팔을 찾았다. 스트레인지가 찾아간 곳은 비밀스러운 시간의 힘을 지키는 조직이다. 평생을 외과의사로 살아온 스트레인지에게 이들의 수행은 납득하기 힘든 방식이었고, 비밀조직 또한 스트레인지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직을 찾기 직전 스트레인지는 강도를 당하고, 이때 그가 가진 시계가 부서진다. 사고를 당해 제 기능을 못 하는 그의 신경처럼 부서진 채 작동을 멈춘 시계. 스트레인지는 이제 이 시계처럼 현실의 시간을 잃어버린 채 다른 시간을 살게 된다. 로벨리가 이 책의 3부에서 말하는 시간은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아니다. 로벨리는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감각하게 되는지, 무엇을 시간이라고 느끼는지를 보여준다. 시간은 세계와 우리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된다. 시간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기보다 우리의 독특한 관점 때문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관점으로 세계의 아주 일부분과만 관계를 맺는다. 시간의 핵심은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희미함에서 비롯된다. 세계의 세부사항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를 희미하게 보게 되고, 그 무지에서 시간이 나온다. 우리가 지구에 살기 때문에, 지구가 아닌 태양과 우주가 움직이는 듯 보이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세부사항에 대한 정보의 부족은 곧 엔트로피의 증가를 뜻한다. 엔트로피는 열과 함께 시간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엔트로피는 배열의 복잡성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에 영향을 받는다. 배열은 최초의 상태에서부터 계속해서 무질서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엔트로피는 점점 증가한다. 이 배열은 세계의 상태뿐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보는 관점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이 배열 안에서도 나름의 인과관계나 법칙을 발견하려 애쓴다. 혼동된 인과관계 안에서 세계는 점점 희미해진 채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하고, 시간의 흐름이라는 우리 나름의 결과가 도출된다. 내 눈에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니까, 태양은 분명히 움직인다는 결론과 비슷하다. 이 세계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세계 밖에 있다고 인식하면 중요한 점들을 놓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세계를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본다. 지도를 이용하려면 외부에서 보는 관점과 나의 현 위치를 동시에 파악해야 한다. 세계를 보는 일도 이런 지표성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우주에서 우주 전체가 아닌 우리와 관련된 세계만을 측정한다. 시간은 우주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문제일 수 있다. 엔트로피는 세계 전체보다 우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점차 증가하며 줄어들지는 않는 엔트로피의 방향성, 우리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시간은 우리의 관점이 가져오는 일종의 혼동과 같다. 시간은 두려움과 함께 온다. 시간에는 우리의 혼란과 근심, 고통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그리움과 애틋함도 담겨있다. 시간이 단지 우리의 문제라면, 시간의 정체를 알기 위해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의 삶은 태어남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는 선상에 있는 과정이고, 사건이며, 구성물이다.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두 지점에 점을 찍고, 두 점을 연결하는 삶을 시간적으로 구성한다. 이 선은 우리 자신을 일관된 정체성으로 묶어준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세계를 성찰하고 설명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현재의 삶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비하기도 한다. 시간을 통해 일관된 의식을 가진 하나의 개체로 자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재구성에 실패하면 사회부적응자나 광인으로 취급된다. 알츠하이머나 뇌줄중 등 뇌손상을 겪은 이들은 시간을 인지하지 못한다. 밤과 낮의 변화나 시간의 간격 등을 감각할 수 없으면, 신체나 언어활동이 가능하다고 해도 다른 이들과 일상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기 힘들다. 시간에 대한 감각은 언어 이상으로 고차원적인 의식의 활동을 필요로 한다. 시간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진화과정에서 우리가 세계에 부여한 인위적 규칙임을 확인하게 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인지는 시간을 지지대 삼아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한다. 시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면 기억이 남아있어도,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며 현재를 살아갈 힘을 쉽게 잃어버린다. 문제는 시간이 존재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시간이 무엇인지를 보는 일이 중요하다. 시간은 우리에게 유용한 하나의 도구였다. 그 도구가 너무나 유용한 나머지 우리는 시간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다. 시간을 통해 우리를 재구성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진다고 느낄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 세계에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할 도구로 시간 이상의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시간에 묶여있을 수만은 없다. 시간의 망상에 사로잡혀 세계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17세기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면, 18세기 철학자 피히테는 이렇게 받아쳤다. ‘나는 활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영화에서 우리의 영웅 닥터 스트레인지는 지구를 삼키려는 영원의 괴물과 맞서게 된다. 영원의 괴물 도루마무는 시간이 없는 세계에서 왔다. 도루마무의 추종자들은 시간이 없는 세계에서 영생을 누리기를 원한다. 흥미롭게도 스트레인지는 도루마무를 물리치는 방법으로 시간을 활용한다. 시간이 없는 세계에서 온 괴물 도루마무를 지구의 시간에 가둬버리자, 도루마무는 견디지 못하고 항복을 외친다. 영원의 지배자는 시간의 지배를 견디지 못한다. 괴물을 물리친 뒤 지구인들은 다시 시간을 회복한다. 도루마무가 지구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듯, 우리도 영원을 견디지는 못할 것이다. 시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의 생존을 위해 활용 가능한 도구이다. 그 도구를 주인으로 섬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영화는 스트레인지의 부서진 시계를 비추며 끝난다. 시간을 무기로 삼게 된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이제 현실의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 시계를 선물한 사람과 나누는 소통과 교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