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릴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들어온 말 중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로 지구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정당화되어 왔다. 인간이 그만한 능력을 갖추었으니, 지구를 지배하고 지구에 사는 온갖 생명체들을 다스려도 된다는 말. 어딘가 좀 꺼림칙하지 않은가. 능력이 곧 지배의 이유라니. 아무리 들어봐도 지배 정당화의 이유가 참 구차하다. 물론 2020년부터는 그 구차한 이유가 더욱 왜소하게 느껴진다. 평소에는 생명체로 취급하지도 않던 바이러스에게 손과 발이 묶이고, 강제로 입까지 봉한 상태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근대의 서구인들만큼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인간’은 중요한 개념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살고, ‘인간’으로서 죽기를 원한다. 분명하게 인간이라는 종으로 태어났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인간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하는 상황. 이런 상황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 아닐까봐 누군가 의심하고 있기에 초래되는지도 모른다. 누가 도대체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고 의심한단 말인가? 정말 맥 빠지는 일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범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스스로가 인간이 아닐까봐 의심하는 이들은 누구도 아닌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인간이 지구의 만물을 지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능력은 한 번도 제대로 검증된 적이 없다. 누구보다 인간 자신이 잘 안다. ‘인간’이라는 범주 자체도 제멋대로 변해왔다. 오직 유럽의 백인 남성들만이 ‘인간’으로 취급되던 시절도 있었고, 유색인종이나 여성은 꽤 늦게 이 인간 범주에 합류했다. 앞으로도 이 ‘인간’ 범주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확장될 전망이다. 안드로이드나 동물이 ‘인간’ 범주에 합류하지 못하리라는 보장 역시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범주는 확정될 수 없고, 기준도 제멋대로다.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일도 대부분 누군가가 ‘인간이 아님’을 주장하면서 나타난다. 유색인종의 혈통, 이교도의 신앙, 광기, 신체의 장애는 오래도록 인간이 거부해왔던 타자성에 포함되었다. 특히 서구의 백인들은 자신들이 이런 타자성에 오염되지 않았음을 주장하여 정상성과 함께 ‘인간’임을 증명 받았다. 물론 유색인종의 혈통과 이교도의 신앙, 광기, 신체의 장애는 언제나 인간 안에서 분리되지 않고 함께 존재해왔다. 아이티섬에서 백인들이 발견한 좀비는 바로 이 타자의 형상이었다. 좀비는 인간을 죽인다. 인간을 죽이고 증식한다. 이 책 《좀비학》의 저자는 아이티섬을 벗어나 미국에서 되살아난 좀비에게서 인간의 죽음을 목격한다. 1968년 발표된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그 예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철학자 푸코는 《말과 사물》(1966)에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서사들이다. 왜 생물학자도 아닌 철학자 푸코가 ‘인간의 죽음’을 선언했을까? 인간은 정말 죽어야만 하는 존재들일까? ‘인간의 죽음’이라는 푸코의 표현은 많은 비난과 오해를 받았지만, 이는 개별인간들의 죽음이나 인간의 멸종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적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개념,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는 근대 철학을 열었지만, 이 주체는 여전히 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보증 받는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할 때까지 이 보증은 그럭저럭 유효했다. 푸코는 니체가 ‘신의 죽음’을 통해 신 자체보다, 신의 보증을 받는 근대의 사유하는 주체를 없애려 한다고 보았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선 신을 먼저 죽여야 한다. 신의 죽음 이후에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 초인은 더 강한 인간이 아니다. 푸코가 선언한 ‘인간의 죽음’을 실행한 인간, 그러니까 인간을 벗어난 인간이다. 인간을 벗어난 인간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일까? 조지 로메로 감독의 첫 좀비영화가 나온 1968년, 세계는 곳곳에서 충돌을 경험한다. 프랑스의 68혁명,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 암살,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반대, 인종차별 반대, 학생들의 대학 점거 시위, 그리고 아폴로8호 발사로 촉발된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공포 등. 세계는 진보와 보수, 구세대와 신세대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다. 인간이 인간을 벗어나는 일은 단계적 발전이나 평화로운 협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타자를 마주하고 인정하면서 전쟁 같은 혼란을 겪는다. 보수주의자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전복하려는 폭도들이 마치 좀비처럼 보였다. 인간의 형상을 닮았지만,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고 물어뜯으려는 식욕만 남은 좀비들. 진보나 젊은 세대에게는 반성하는 의식 없이 관성대로만 살아가는 보수나 기성세대가 좀비들처럼 보였다. 삐걱대는 몸으로 누가 뭐래도 제 갈 길을 가면서 욕심껏 인간의 살만을 탐하는 좀비들. 인간이 인간을 좀비로 보는 시대는 그렇게 도래했다. 아직 위버멘쉬를 말할 단계는 아니어도, 인간과 주체의 동일성과 자명함은 사라졌다. 흥미롭게도 로메로의 영화에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형태의 좀비가 모두 등장한다. 각각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보는 좀비와 젊은 세대의 시각에서 보는 좀비이다. 아버지의 무덤에서 불경스러운 행동을 하는 젊은이를 응징하는 좀비와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고 기존의 가치들을 모두 전복해버리는 괴물 같은 좀비. 인간과 대결하며 증식하는 좀비는 이제 ‘휴머니즘’에 대항하는 ‘안티-휴머니즘’의 대표 괴물이 된다. 좀비는 사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대의 주체를 벗어난다. 재미있는 점은 많은 영화들에서 좀비 확산의 이유로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꼽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좀비가 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문명의 위험으로 설명된다. 사유하는 주체의 가장 위대한 결과물인 과학기술문명이 인간의 사유능력을 파괴하여 더 이상 주체가 되지 못하도록 만든다. 한때는 인간에 속했던 가해자는 좀비가 됨으로써 피해자가 되고, 다시 좀비라는 새로운 주체(혹은 비체)가 되어 문명과 인간을 파괴한다.
인간과 구분되는 좀비의 가장 큰 특징은 식인이다. 식인은 오래도록 인간에게 금기였다.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려면 인간을 먹지 말라. 이 금기는 인간의 오랜 카니발리즘 역사를 감춘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가족을 죽이고, 죽여서 신에게 바치고, 바친 고기를 먹었던 이야기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살을 물어뜯으러 온 이는 누구인가. 내 가족의 얼굴을 하고 있을 수도 있는 그를 우리가 좀비라 부른다면, 그는 우리 인간 안에서 태어났다. 언제나 우리 안에 있었던 그를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불러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