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만큼 핫한 곳도 드물다. 기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어떤 해괴한 국민청원이 올라왔는지를 기사화한다. 소셜미디어에는 자신이 지지하는 국민청원 글에 동참지지를 호소하는 글이 끊이지 않는다. 가끔은 ‘이런 것도 청원하는 못난 것들’이라는 투의 조롱 섞인 글들도 보인다. 그런 조롱을 하는 이들은 이미 어떤 전제를 하고 있다.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해야 하는 글과 하면 하면 안 되는 글이 있다는 전제. 이 전제 아래서 해야 하는 글에 대해서는 지지하지 않는 이들을 어리석고 나쁘다고 하고, 하면 안 되는 글을 지지하는 이들 역시 어리석고 나쁘다고 한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내 편은 정의롭고 너희들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식이다. 신을 믿지 않는 이들도 진리와 정의를 신봉하며,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자도 법에는 머리를 조아린다. 신을 믿고 왕을 숭배하는 것은, 진리와 정의를 신봉하고 법을 숭상하는 것과 다른가. 신이 스스로에게 절대적 옳음을 부여한다면, 진리와 정의는 절대적 옳음과 무엇이 다른가. 지혜로운 왕의 통치를 바라는 것과 현명한 법치를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어쩌면 신이 진리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둔갑했듯, 왕의 통치는 법의 통치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신이 아니기에 자신에게 진리와 정의의 이름을 부여할 수 없다. 자신에게 절대적 옳음을 상정하는 순간, 우리의 사유는 무능력해진다. 절대적 옳음을 흉내 내기 위해 현실의 누군가에게 진리와 정의의 이름을 부여해서도 안 된다. 그 역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에게 구하던 자비와 현명함을 법에 요구해서도 안 된다. 법이 왕도 아니면서 우리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 아래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기 때문이다. 법은 우리의 숭배를 먹고 자라서 우리의 목을 죌 수 있는 힘을 키운다. 대부분의 왕이 어리석고 냉혹했던 것처럼, 법 역시 어리석고 냉혹하다. 박근혜 정부가 떠난 자리에 다음 대통령이 왔다. 스스로를 국민이라 부르는 이들은 박근혜 정부 시절의 모든 문제들을 박근혜 한 사람, 아니면 그의 최측근들에게 씌워버리려 한다. 그렇다면 자칭 국민이라는 우리는 무구한 피해자이기만 할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기만 했던 것일까. 다음 대통령이 자비롭고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해주길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 자신이 가진 가해의 경험을 잊어버리고 피해만 기억하려고 할 때, 우리는 누구보다 잔인하고 어리석어질 수 있다. 망각 덕분에 가해는 반복되고,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하고 옳다는 망상에 빠져든다. 망상 속에서 우리는 작은 신이 되어 불바다와 대홍수를 일으킨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언제나 선하지도, 옳지도 않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견디기 어려워 자신이 정의롭다 착각하며, 신의 이름을 탐내지는 말자. 차라리 자신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하며 무명으로 살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