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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마오] <혁명후/기> 광기보다 이성: 0814 발제2019-08-1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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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후/기》9장 ~ 15장: 광기보다 이성

 

많은 이들이 문화혁명을 가능하게 한 힘을 광기로 꼽는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문혁을 겪은 한사오궁은 그런 말에 고개를 젓는다. 어떻게 수억 명의 광기가 동시에 폭발할 수 있단 말인가. 비이성적 판단이란 오히려 문혁을 그렇게 단순하게만 보려고 하는 태도가 아니겠느냐고. 나아가 문혁은 광기가 아닌 이성을 통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얼핏 광란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문혁의 주체들은 철저히 자기 이익을 추구했다는 게 한사오궁의 판단이다. 광기가 아니라 이성, 철저하게 자기 이익을 좇는 ‘이익 이성’이 문혁을 가능하게 했다.

 

문혁의 구도는 기본적으로 경쟁이었다. 사회의 부족한 재화는 경쟁을 통해 나누어진다. 공산당은 지주를 몰아내면서 자신들이 부를 독점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계급이 경제적 배분에서만 나타날 것으로 예상한 탓이다. 문제는 경제적 부 말고도 나누어가져야 할 것이 많았다는 데 있다. 경제적 부와 관계없이 집중되는 권력행사의 문제가 나타났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권력에 접근하고,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데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상도 벌도 가능하지 않은 시대의 새로운 경쟁방식이었다.

 

한사오궁은 문혁 이전의 중국사회가 두 가지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바로 봉헌형 경쟁과 공격형 경쟁이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모두 기독교에서 나왔으니, 공산주의에도 분명히 기독교의 요소가 잠재해 있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와 경쟁의 형태가 다를 뿐. 권력에 접근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경쟁적으로 봉헌을 하고, 공격을 했다. 봉헌형 경쟁은 자기 안에 신을 만드는 방식이고, 공격형 경쟁은 자기 바깥에 악마를 만드는 방식이다. 두 방식은 한꺼번에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봉헌형 경쟁은 ‘만민의 성도화’를 이루게 했다. 진심이 아닌 봉헌을 하게 하여 민심을 미화시킨 ‘만민의 성도화’는 문혁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훗날 자신의 하방과 모든 공산주의 활동이 자의가 아니었다며 문혁을 성토하는 많은 이들이 봉헌형 경쟁을 통해 나타난 성도들이다. 실제로 성도화는 문혁의 큰 활력이었고, 국가의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었다. 성도가 된 지식인들은 인민의 문자 해독력을 높여 중국 노동자의 노동력을 향상시키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경제적 부가 보상으로 뒤따르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해내지 못한 수치의 성과가 봉헌형 경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타인을 악마화하고 감시하는 ‘만민의 경찰화’는 공격형 경쟁을 통해 나타났다. 적개심을 강조하는 ‘만민의 경찰화’는 모든 인민을 서로의 감시자로 만들었다. 인민은 자본주의의 사치스러움을 표방하는 모든 반동적 상징들을 멸시했고, 논문표절이나 촌지 등의 부정행위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인민은 중국이라는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프로세스로 존재했다. 공격형 경쟁과 봉헌형 경쟁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며 함께 이루어졌다.

 

한사오궁은 이 경쟁을 통해 ‘군중 전제’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경제활동은 정치에 잠식되었고, 폭동에 참가했던 이들은 이제 충성을 다하는데 목숨을 걸었다. 그 충성이 가진 적극성은 주동적인 동시에 피동적인 것이었다. 군중은 모범 공민의 지위를 쟁탈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국가에서 벗어난 민간의 폭력은 전부 해제되었고, 기층 속으로 국가의 행정시스템이 파고들었다.

 

이 거대한 관료주의 사회에 위협을 가한 것은 반국가단체가 아니라 국가의 최고권력자인 마오쩌둥이었다. 한사오궁은, 사회주의 관료제를 비판한 좌파 혁명가로 마오를 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이 이렇게 탄생되었으리라고 본다. 한사오궁은 ‘마오의 문혁’과 ‘인민의 문혁’을 구분해서 본 어느 학자의 의견에 동조한다. ‘마오의 문혁’과 ‘인민의 문혁’은 서로 이용하는 관계였지만, 같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문혁의 동력을 한두 가지로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분명히 설명하기 힘든 여러 가지 우연적인 힘들이 문혁을 추동했다. 문혁이 무엇이라 단순하게 정의할 수도 없다. 누군가는 문혁을 매카시즘의 거울상으로 본다. 마오의 독재를 상징하는 정치적 사건, 혹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발붙일 틈 없는 중국 정치의 대표적 예로 문혁이 거론되기도 한다. 그런 설명으로는 국가 최고지도자의 허용 아래 국가권력이 2년간 마비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 한사오궁은, 아무런 장애도 제한도 없는 ‘민주’와 ‘자주’, 군중이 주인이 되었던 상황이 문혁의 이면에 분명히 존재했었음을 지적한다.

 

한사오궁이 여러 번 지적하듯 당시의 중국은 더 이상 이전 방식의 상이나 벌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였다. 경제적인 방식의 상과 벌이 불가능해졌으니, 사람들은 물질적 이익에 점점 둔감해져갔다. 물질적 이익에 대한 둔감은 다른 영역에 대한 감각을 깨웠다. 인민은 점차 정치적 영예와 정치적 안보, 정치권력에 대해 민감해졌다. 경제영역에서 정치영역으로 넘어간 이 경쟁을 이해하지 못하면, ‘문혁’이 병리적이거나 폭력적이라는 진단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한사오궁이 지적하듯, 역사 속 대규모 폭력은 늘 ‘순결’을 가장한 폭력이다. (160쪽) 극단주의는 보통 ‘순결주의’를 내세운다. 개인의 청빈과 경건은 도리어 위험한 심리적 면허가 되어, 폭력을 조장하고 표백하며 면죄하는 자기 정당화의 기제를 제공한다. (161쪽) 한사오궁은 문혁의 증거들을 제대로 믿지 못한다. 그 증거를 만든 이들이 문혁에 의존하여 권력에 접근하려 했던, 시류에 편승하는 자들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사오궁에게 문혁은, 아주 단순한 사건도 아니고 오로지 무질서로만 점철된 사건도 아니다.

 

문혁은 중국의 역사에서 사유의 공백이다. 문혁을 비판하는 자는 많아도, 문혁을 사유하는 이는 적다. 문혁을 겪은 이들도 각자가 처해있던 상황에 따라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며, 그 방식과 사후요구에서마저 위계가 나타난다. 이 책의 초반부에서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던 한사오궁도 문혁을 가능하게 한 주된 힘에 대해 말할 때는 냉정함을 버리지 못한다. 혁명이데올로기가 낡은 이익관계를 반영하고 확장했을 때, ‘이익’을 좇는 ‘이성’이 고개를 들었다. 표면에 맹목적 충성이 있었다면, 이면에는 이기심이 있었다. 한사오궁은 혁명의 피해자들에게, 당신들을 추동하는 힘은 이 이기심이었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아버지의 삶을 집요하게 뒤쫓은 아들이, 다시 아버지가 되어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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