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에서 젠더로, 젠더에서 다양한 섹슈얼리티로
게일 루빈 선집 《일탈》 12장 성적 거래: 주디스 버틀러의 게일 루빈 인터뷰
주디스 버틀러는, 게일 루빈이 페미니즘 이론과 레즈비언·게이 연구방법론을 세웠다고 여긴다. 그렇게 여기게 된 주된 텍스트는 「여성 거래」와 「성을 사유하기」이다. 게일 루빈은 「여성 거래」를 통해 계급과 젠더를 구분하고, 「성을 사유하기」를 통해 젠더 억압과 통념에 어긋나는 욕망에 대한 억압을 구분했다. 두 텍스트는 게일 루빈의 사유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게일 루빈은 그 전환이 개인의 변화뿐 아니라 사회·정치적 맥락을 둘러싸고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두 텍스트의 고민지점들은 당시의 보편적 담론들과 멀어지는 게일 루빈의 상황을 아주 잘 보여준다. 「여성 거래」에서 게일 루빈은 당시 페미니즘을 설명하는 주류이론이었던 마르크스주의와 결별을 꾀한다. 당시 좌파의 주류담론이었던 반제국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외치는 여성해방은 한계가 있었다. 한계를 절감한 게일 루빈에게 인류학과 프랑스의 구조주의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도 마찬가지다. 「여성 거래」는 그런 배경들 안에 있는 특정한 지점에서 탄생했다. 바로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페미니즘 논쟁의 한계, 인류학과 구조주의의 영향, 여기에 정신분석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젠더가 친족 문제와 결합되어 있고 친족문제의 전복이 젠더의 전복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게일 루빈의 극단적인 주장은, 주디스 버틀러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기도 했다. 이것은 용어 사용상의 문제 혹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게일 루빈에게 젠더 문제는 섹슈얼리티의 하위 범주처럼 인식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그 섹슈얼리티 자체가 고정되지도 않고 무수하게 분화된 상태에서 변화해가는 상황이다. 도저히 고정할 수도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고, 과연 범주화가 가능하기나 할지 의심스러운 섹슈얼리티의 하위 범주로서 젠더, 이런 상황에서 젠더는 무엇이며,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게일 루빈은 자신의 섹슈얼리티 실천과 작업을 통해 젠더의 유동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극한의 유동성은 게일 루빈 자신의 이론적 배경이 된 정신분석학과 특정 담론 자체의 보편적 유용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게일 루빈에게는, 어떤 담론도 모든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없다. 특정한 학문이나 담론이 어떤 문제를 포착하고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 되어서도 안 된다. 페미니즘이 섹슈얼리티를 분석하는 특권적 장소가 되고, 성 정치(동성애, 포르노,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들의)를 특정한 형태의 페미니즘에 종속시키려 한다는 게일 루빈의 비판은 이런 토대에서 이루어진다.
《성의 역사 1》에서 푸코가 언급한 혼인장치와 섹슈얼리티 장치는 인류학에 기초했던 게일 루빈의 논의를 또 한 차례 변화시킨다. 그러면서 친족을 지워버리는 게 아니라, 친족 위에 중첩되어버린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게 만든다. 도시의 레즈비언·게이공동체들은 게일 루빈이 보기에 새로운 형태의 친족이었다. 레즈비언·게이·트랜스섹슈얼에 대한 논의들이 페미니즘에 종속당했을 때, 페미니즘은 이런 성적 변이형태들을 이해하는 도구로 적절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이 아주 이상적인 방식으로 가족의 해체를 논의할 때, 레즈비언·게이·트랜스섹슈얼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도시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려 했다. 안타깝게도 그 형성은 때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좌절되기도 했다.
게일 루빈의 연구에서 ‘보았다’라는 말은 중요하다. 그의 연구가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동성애자이고 S/M인 게일 루빈에게 실제의 동성애와 S/M연구는 아주 중요하다. 실제 인구집단에 대한 분석이 아닌, 문학적 혹은 철학적·정치적 방식의 해석을 통해 이루어지는 동성애와 S/M 논의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연구는 이론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분명하게 실제 인간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해야 한다. 특정한 섹슈얼리티는 특정한 섹슈얼리티를 가진 인간을 통해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러니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관계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적인 것이라는 게일 루빈의 주장은 얼마나 타당한가. 개별 인간의 보편성과 일관성은 실제가 아닌 이론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허구이다. 인간은 언제나 개별성을 잃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고정된 무엇, 항상 범주화할 수 있는 무엇으로 보는 일은 인간 자체를 고정되거나 항상 범주화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일과 같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잘못인가, 아닌가를 묻기 전에,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