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플라톤의 '국가'] 3권 발제2019-10-0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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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시상詩想 사악하겠어, 플라톤 마음에 드는거지

에레혼

내 졸업논문은 ‘중국의 소설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하는 물음에 여러 학자들이 어떤 대답을 내놓았는지 정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중국 문학에서 소설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교수는 중국 문학에서 소설이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 출입증’ 획득 과정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의 옛소설은 시를 중간중간에 넣기도 하고 다른 권위있는 문헌의 형식을 베끼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배경에서 중국 소설의 발생을 이야기하려면 운문으로부터 핍박(?)받았던 역사를 줄줄이 언급하며 변호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커져만 가는 논문 스케일이 감당이 안될 때마다 ‘논문 주제가 중국 문학이 아니었다면 좀 나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를 보니 중국 바깥의 상황도 녹록하지는 않다. 고대 그리스에도 역시 문학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소크라테스(와 그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플라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에서 시인과 산문 작가 모두를 문제로 삼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에게 (저승에 대한) 두려움을 유발하고(386c~387a), 죽음에 대한 비탄을 묘사하는 문학(388a~388d)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어서 등장하는 ‘웃음을 좋아하지 않는 태도(388a), ‘절제(389d)’ 등은 모두 통치자가 갖춰야 할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러한 덕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시 구절이 인용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이 그리스에서 사라지면, 소크라테스가 2권에서 강조했던 “신을 언제나 사실 그대로 묘사”(379a)하고 “신만이 좋은 것의 원인”(379c)이라는 논리를 충실히 따르는 작품만이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역설적이게도 문학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든다. “나아가 우리는 저승과 관련된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이름들도 모두 버려야 하네. …… 그런 것들은 다른 목적에는 쓸모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종류의 전율로 우리 수호자들이 너무 조급하고 유약해지지 않을까 우려되네.(387c) “시인은 이 두가지가 다 사실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며, 신들은 악의 근원이라고, 영웅은 사람보다 조금도 나을게 없다고 우리 나라 젊은이를 설득하려 해서는 안 되네.(391d) 이쯤 되면 소크라테스의 논의가 시의 파급력을 문제로 삼는 것인지, 말에 담긴 주술성을 걱정하는 것인지 혼동이 올 정도이다. 심지어 거짓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자기 모순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계급 시스템을 후대에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우화 내지는 신화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415a~d) 3권 말미까지 읽고 나면 젊은이를 선동하고 거짓을 담고 있더라도 목적이 올바르다면, 서사시는 용인될 수 있는지, 소크라테스에게 대들고 싶은 기분마저 든다.

이왕 중국 문학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뗐으니 마무리도 중국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아무래도 고대인들은 산문보다는 운문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여러 사람 살펴볼 것도 없이 공자가 그랬다. 그는 시를 중요시해서 당시 세간에 남은 유명한 시를 300여편으로 정리하여 《시경》을 엮어냈다. 이렇게 공자와 시는 인연이 깊은데, 아마도 시에 대한 공자의 가장 유명한 말은 《논어》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일 것이다. “시 300편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 공자가 생각한 시의 정수인 시경은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니, 이는 곧 공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시를 정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처럼 어떤 시가 좋은지 나쁜지 구구절절 적어주었다면 분명했을텐데. 공자는 시 자체에 대한 평가를 많이 남겨놓지 않아서 이후 중국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큰 숙제를 던져주었다. 그나마 관계가 있는 구절은 《시경》의 첫번째 작품인 <관저>를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 슬프지만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樂而不淫, 哀而不傷)”고 평가한 것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평가도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절제나 중용을 높게 평가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는 게 흥미롭다.)

이렇게 모호한 평가는 이후에 많은 주장들을 이끌어 냈다.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에서 생각의 주체는 작가인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인지, 그리고 사악함이 없다는 것은 윤리적 가치판단인지, 문학적 서정성을 의미하는 것인지─다양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다행인 것은 공자가 직접 지은 시가 전해 내려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그가 직접 작품 창작을 즐겨 했더라면 자신의 시론(時論)과 작품의 내용이 상충되는 부분이 발견된다거나, 이후에 시 창작의 경전으로 자리하며 또 다른 논란을 가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 3권에 등장한 시에 대한 논의를 공자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소크라테스는 친절하게 예를 들어가며 ‘무사(無邪)’와 거리가 먼 작품을 짚어주고 있는 셈이다. 공자가 택한 시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 플라톤이 《국가》에서 모순적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강조했던 올바른 시의 모습─ 두 관점 중에 어떤 것이 더 옳은 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그저 나는 ‘시구를 지워버리더라도 시인들이 이해해야 한다는 태도(387b)’나 3권 말미에 등장하는 우화 속 계급주의(415b~c)에조차 시대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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