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세미나] 제6장 중세 2021.2.10. 발제:토라진 아우구스티누스 - 신앙과 이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새로운 기독교적 개념들(만물의 중심인 인간, 직선적 발전 과정으로서의 역사,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 개념)을 도입했다. 또한 인간이 신의 예정된 계획에 종속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 내적 존재인 영혼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플라톤주의 견해에 동조한다. 그는 기독교와 신플라톤주의의 종합을 만들어내며 여기에 한 가지 더, 영혼도 죄악에 빠질 수 있다는 원죄 개념을 부가했다. 그는 세계를 지상의 나라(악한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선한 나라)를 구분했다. 지상의 나라는 선과 악의 역사적 투쟁이 지속되는 한, 원죄로부터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꼭 있어야 하는 필요악으로 보았다. 정치는 도덕적 악을 통제하는 권위주의적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조직으로의 교회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필요했다. 결국 세속의 제국은 정치권을 가진 황제와 구원을 수행하는 교황에게 종속되게 되었다. 인식론에 있어서 그는 신앙과 사상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면 신앙이 무조건 옳다고 보았다. 사유가 가능한 것은 바로 신앙 덕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회의주의(확실한 지식이 불가능하다고 주장)를 반박 – 자기 성찰과 내성, 수학과 논리적 원칙과 관련하여 확실한 지식이 가능하다 - 하면서 감각과 외부세계보다 내적 삶과 순수한 형식이 인식론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논증들은 최고의 존재, 신이라는 영원한 진리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세계관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일자 개념이 역사적 제약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비인격적이라고 여겼던 신플라톤주의자와는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주의 법칙은 신의 인격적 의지의 표현이라 주장했다. 신은 우주의 모든 것을 창조한 독립적이고 영적인 힘이므로 신과 인간이 무아의 경지에서 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신플라톤주의적인 생각을 견지할 수 없었다. 인간이 신과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앙을 통해서이다.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이나 순수 이념이 아니라 인격적 성격을 띠는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이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감정(사랑과 연민, 수치심과 유감, 신에 대한 사랑)과 의지, 죄와 벌이 중심 개념이 되었으며 정신적인 것은 육체적인 것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다. 이성에 우선하는 의지는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처음에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 자유의지가 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신은 왜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을 왜 창조한 것일까? 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는 결국 나중에는 자유의지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만 주어진다며 종전의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결국 인간은 아담으로 인해 원죄를 안고 태어날 수밖에 없으며 구원을 받는 사람은 신의 은총을 받는 소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설이다. 신은 세속적 시간에서 보면 신은 인간의 행위를 미리 알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세속적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신은 시간과 동시에 존재하며 인간의 행위를 미리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과거를 회상할 때 미리 결정하지 않는 것처럼. 토마스 아퀴나스 : 조화와 종합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과 세계를 조화시키고,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켜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화하였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실재론(개념들은 오직 대상들 내에서만 존재하고 우리는 추상을 통해 대상들 속의 보편자들을 인식하는 것)을 수용했는데, 아퀴나스에게 개념실재론은 우리의 자연적 이성을 통해 우주의 원리를 인식하고 신의 존재 역시 증명할 수 있다는 신학적 함의를 갖게 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고 계시 없이도 덕 있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덕과 행복을 넘어서는 최종 목표는 구원이다. 그리고 여기에 도움을 주는 것이 성직자의 과제이다. 덕과 행복은 구원의 기반이기 때문에 정치가는 이러한 삶을 실현하도록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결국 성직자와 정치가는 같은 과제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 아퀴나스에게 최종의 목적은 다음 생에서의 영원한 구원이며 최상의 사회적 환경은 법률에 의해 규율되는 기독교 사회이다. 아퀴나스에게 법률은 공동선을 위해 만들어 공표한 이성의 칙령이다. 또한 선한 삶의 적극적 실현을 위해 지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법률뿐 아니라 덕이다. 이런 이유로 지혜와 용기, 절제와 정의라는 4주덕과 믿음, 소망, 사람이라는 기독교적 덕목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우리는 이성적 성찰을 통해 자연법(신의 섭리를 표현하는 이성의 칙령인 영원법이 현실화된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자연법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좋은 삶에 대한 지식은 비기독교인들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위한 신의 법을 알게 된다는 유리한 입장에 놓인다. 그는 정치적 – 윤리적 삶의 상대적 독립성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신적인 질서 아래 예속시켰다. 아퀴나스는 지식이 감각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는 무관하게 개념들은 대상들 속에 독립적인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다. 우리는 사유를 통해 대상들 속에 현시된 개념들만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각 능력은 우주 만물을 인식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고 우리의 인식능력은 보편적 형상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여기서 신은 믿을 수 있는 지식의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일종의 보증자이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세속적인 삶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기본적으로 긍정적이 것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상관없이 합리적인 사회적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아퀴나스의 도덕철학의 핵심요소는 인간이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는 능력들(잠재력들)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좋은 행위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충족시키는 고유한 인간적 능력들을 최대한 실현하는 행위이다. 또한 인간은 목표 지향적이며 이성이 의지에 우선한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우리는 이성이 좋다고 인식한 것을 행하고 이성이 지시해주는 목표를 열망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우리가 현세적 이성과 세속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만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최고 목표는 구원이며 구원을 위해서는 계시와 신앙이 요구된다. 결국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기독교와 조화로운 것으로 보았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궁극적 목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도덕성이 종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아퀴나스에게는 신의 존재 증명이 필요했다. 이성이 지각 가능한 개별 사물들을 넘어서는 영역에 대해서도 작동한다는 개념실재론과 이런 과정이 밑바닥에서 지각 가능한 개별 사물들로부터 출발하여 위로 상승한다는 온건한 개념실재론에 기반을 두고 아퀴나스는 신을 증명하는 다섯 가지 방식을 전개한다. 다른 원인을 갖지 않는 최초의 원인인 원동자로서의 신(우주론적 신) /모든 존재의 원인으로서의 신(인과론적 신) / 필연적 존재로서의 신 / 최상의 완벽한 존재로서의 신 / 최종 원인 혹은 목적으로서의 신이 그것이다. 신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면 신은 악의 원인이기도 한 것일까? 아퀴나스에 의하면 악은 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한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악은 실재하며 그 원인은 신이다. 그런데 이 악조차 일차적 원인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서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자유의지를 준 것은 신이었지만 인간이 그것을 오용했다는 것이다. 이 악은 좋음과 신의 결핍이라는 의미에서 악이다.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어떠한 원인도 가지지 않는다. 신은 이 악에 대해서 아무 관련이 없다. 마르틴 루터 – 주의주의와 유명론 : 오직 신앙만이 신학적으로 마르틴 루터는 성서와 개인의 신앙을 옹호하면서 전통과 교황에 반기를 들었다. 그 결과 종교개혁은 이 세상에서 마술을 쫓아내는 역사적 과정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에 우위를 두었던 오컴의 유명론을 따랐다. 루터의 비관주의적 인간론은 아우구스티누에게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고 홉스와 니체, 프로이드에게 영향을 미쳤다. 루터에 의하면 신은 인간에게 직접 계시를 주며 인간은 신의 은총을 받는 수동적 존재이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신과 직접 만나게 해준다. 루터는 오로지 신앙만이 인간에게 정당함을 내려준다고 말했다. 이성은 윤리 규범의 토대가 될 수 없다. 루터의 신앙은 주의주의적 면모를 갖고 있다. 신이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사이에 선을 그었다면 신은 이것을 자주적 의지의 행위로 행했다는 것이다. 오로지 신의 의지가 모든 사물의 잣대이다. 신 스스로 그렇게 의지했기 때문에 그로써 일어난 일은 옳아야만 하는 것이다. 루터의 정치사상은 영적 권력과 세속 권력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세속적 지배 체제는 사회의 정의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이 지배 체제는 칼을 사용한다. 반란자는 신의 적이 된다. 칼을 휘두르는 것은 신에 대해 봉사, 즉 예배이다. 독일 농민전쟁에서 농민을 격렬하게 공격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영적 지배 체제는 말을 사용하고 피통치자와 통치자 모두의 양심에 호소한다. 내적 인격체에 대해서는 신만이 홀로 통치한다. 따라서 이단에 대해서는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이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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