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세미나 - 조총과 장부 5장 우리는 저마다의 비주류를 지향한다 에레혼 《조총과 장부》의 남은 분량이 절반을 넘어서 마지막 페이지에 더욱 가까워졌다. 여기까지 읽으니 저자의 논의 방식에 익숙해진 기분마저 든다. 저자는 5장에서 애증과 은원이 교차하는 15세기 이후 아시아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명대 이전까지 아시아 일대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저자는 평화로운 공존이 깨지는 데에 다중적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5장은 아시아 권역에서 경제적으로 유력한 국가가 등장하고, 이전까지 무력을 거의 행사하지 않던 지역이 적극적으로 총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상황에 대한 서술로 이뤄진다.
지역의 강자로 부상한 국가가 상대적으로 강력한 무력을 갖추면서, 전쟁은 더욱 격렬해지고 규모 또한 커졌다. 자연스럽게 전쟁 비용이 많이 들게 되었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경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모든 구성원이 전쟁에 항시 대비하면서 작전 수행을 준비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는 과거에는 볼 수 없던 상황이다. _ 본문 275쪽
……이전 냉병기 시대는 인력 밀집형 군대로, 싸우는 사람의 수가 중요한 반면 화기 시대가 되면서 기술 밀집형, 자본 밀집형 군대로 전환했다. 선진 무기를 갖추고 잘 조직된 군대만 있으면 그 규모가 작더라도 구식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중국이 정한 국제적 법칙(조공 제도)에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일본, 안남, 미얀마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_ 본문 304쪽
《조총과 장부》 5장에서는 아시아의 실력자로 등장한 여러 주체(몽골, 만주, 안남, 시암, 미얀마, 그리고 서양 열강)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이어진다. 하지만 리보중의 논의는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아시아 권역에서 활동했던 주체들의 정복·방어를 촉발한 매개체은 조총(군사 세계화)과 장부(경제 세계화)이다. 저자는 이를 다시 한 줄로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과거에 볼 수 없던 상황"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과거는 어떤 시절이었는가? 책의 서술에 따르면 중국이 조공 질서의 맹주로 그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던 때로, 15세기 이전 아시아에서 중국에게는 감히 누구도 도전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본문 274쪽) 저자는 호시절을 설명하기 위해 중국사에서 국력이 가장 융성했던 원대를 끌어온다. 그러나 해상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제질서의 동요"가 일어나 중국은 자국의 지위에 대한 도전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리보중은 한 군사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화약 앞에 모두가 평등해진 아시아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러한 논의 전개를 두고 중국인 저자의 회한을 독해하는 일은 과도한 해석일까?
저자가 그리는 때, 그러니까 아시아가 아직 동요하기 이전 시기 해당 권역을 지탱하고 있던 시스템은 조공 체제였다. 그런데 리보중은 한술 더 떠서 중화 조공 시스템이 중국에게는 손해였을 뿐, 이득이라 할만한 요소가 없었다고 폄하한다.
……존 페어뱅크 교수는 '조공 시스템 속에서 중국이 이익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 황제가 답례로 주는 예물의 가치가 공물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이 무역의 의미는 제국으로서 상징을 과시하고 주변국들을 적당히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_ 본문 306~307쪽
중국은 번속국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군사적 개입을 감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공 시스템은 제국주의적 요소가 없으며 이 시스템은 상징적인 종속관계에 불과했다는 것. 조공 체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리보중의 설명이 아주 특이하다고 볼 수는 없으며, 그의 해석은 다수의 중국 국적 역사학자/정치학자들이 채택하는 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설명에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번속국의 입장에서 조공 시스템에 편입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저자는 책의 앞선 내용에서 중국, 한반도, 일본, 베트남을 유교 문화권이라고 묶는 데에는 무리가 없으나 이 국가들을 동아시아라고 묶어서 지칭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고 언급했다.(본문 37쪽) 해당 챕터는 동아시아 내지는 동북아라는 명칭의 난감함을 설명하는 부분이고, 앞 문장의 방점도 뒷부분에 놓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유교 문화권이라는 용어야말로 곰곰이 뜯어보아야 하는 표현이 아닐지. 조선은 왜 유교 문화권에 포함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유교 이념이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정치에 밀착할 수 있었다는 당위적인 언사 말고,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한반도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상, 조선이 통치 이념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선택지가 된다. (여기서 조선을 일본이나 베트남으로 바꿔도 '선택지 없는'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중국이 늘 조공 관계에 있는 '아우 국가'에게 손해를 보고 있었다는 대인배적 면모를 말하기 전에, 그런 손해를 감내하고서라도 중국이 조공 관계를 폐기하지 않은 이유를 더 깊게 파고 들어야야 한다. 손해만 보는(?) 고대 중국의 상황에 대하여 원론적 해석도 가능하다. 물질적 손해를 입는다고 의를 저버리는 일은 군자라면 피해야 하는 일이었을 터. 고대 중국이 짜놓은 판, 조공 질서로 구축된 국제 질서에는 갑을관계란 존재하지 않거늘. 조공 관계를 언급할 때 이익에 위배된다느니, 제국주의적 야심이 있었다느니 하는 해석은 가당치 않은 소리로 취급된다.
리보중이 이 발제문과 같은 해석을 보면 억울함을 토로할지도 모른다. 실제 《조총과 장부》는 정보 전달에 치중하며 저자의 주관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5장까지 읽은 현 시점에서 저자의 입장(혹은 관점)이라고 할만한 구석은 책 도입부에 글로벌 히스토리 운운한 부분 이외에는 찾기 어렵다. 《조총과 장부》에서는 실제로 중국과 아시아의 역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동·서양을 막론한 다양한 주체를 등장시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국가 뿐만 아니라 선교사, 상인, 통역사 등 다양한 인간 군상까지도 포함된다.
다양한 사료의 사용을 고려했을 때, 리보중의 연구 방법론은 다양한 주체가 쌓아 올린 역사를 구축하려는 글로벌 히스토리의 이상을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다양한 주체를 동원해서 세계사를 바라보려는 시도가 '대항해시대를 중국 중심으로 해석하기'와 같은 학문적 수행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저자가 건조한 팩트만 나열해가며 책을 서술한들, 유럽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가 새로운 중심 세우기로의 회귀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듯 보인다.
5장을 다 읽고 나니 엉뚱한 질문이 맴돈다. "비주류는 영영 비주류로 남을 수 없는가?" 주류에 편승하고픈 욕망과 한때 주류에 속했었다는 기억은 비주류를 불완전한 것, 극복해야 하는 상태로 정의하도록 만든다. 주류 담론을 비판하지만 자신들도 기득권의 위치에 서고 싶다는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중국 학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과 우리의 자아인식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망망대해가 놓여있는 듯 보일 정도이다. 비주류에도 급이 있는 법, 비주류를 자처한다고 모두가 같은 비주류일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