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과 장부』 6장 전략과 군대 명대 후기의 국가 운명과 군사 개혁운동 2023.11.16. 손미경 1.중국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은 ‘변경을 지키고 영토 확장을 하지 않는다는’ 정책으로 자칭 중국은 오랫동안 풍요로운 국가로 거대하고 다양한 생태지역 덕분에 유용한 자연 자연을 대량으로 보유하기도 했으며 둘러싸인 지리 환경도 대외 확장에 걸림돌이 되어 굳이 호전적으로 국토확장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한다면 지리적으로 가능한 곳까지 영토를 확보했다고 할 수 있겠다. 보통 중국은 두가지 국방 전략이 있다고 하는 데 하나는 북방 유목 민족과의 전쟁, 그리고 문화, 경제, 외교 수단으로 본토의 화하 문명을 전하는 ‘회유정책’을 언급한다. 그러나 사실 중국 역대 황조가 펼친 국방 정책의 기조는 ‘방어’이다. 이 방어는 적극적, 소극적으로 볼 수 있는데 전자는 변경 바깥으로 출병해서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적의 의지를 꺾어 본국의 안전을 지키는 것(송대 이전) 후자는 변경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한 다음 침입을 막아내는 것 (만리장성)
명대는 이 두 가지 전략을 모두 사용했는데 명대에 쌓은 만리장성은 장성에 군사기지 진을 설립하고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군비가 소요되었다. 명대 국가 재정의 대부분이 여기에 사용되어 엄청난 국가 부담으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는 군사 행동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세계 정세는 초기 경제 세계화로 엄청난 변화가 나타나 유목 민족이 기동성을 바탕으로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여러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또한 항해 기술과 지리학이 발전하면서 해상 세력이 중국의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하여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강력한 정권이 수립 되었고 해적의 세는 더욱 커져갔다. 즉 명 조정은 ‘북쪽의 화’를 해결하지 못한 채 새로 출현한 남쪽과 해상의 위협에 맞닥뜨리는 상황에 봉착했다.
2. 문제투성이의 명나라 군대 명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은 아주 제한적이어서 큰일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겉으로 볼 때 명의 군대는 많은 병력의 수와 더불어 냉병기와 화기를 병용하는 선진화된 것처럼 보인다. 화기 사용에도 매우 활발했으나 질적인 면에서 큰 한계가 있어 실전에서는 활에 미치지 못했다. 즉 생산 수량도 턱없이 부족하고 질이 떨어져 실전에서 소용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군대 체계 역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명은 ‘병농합일’이라는 衛所制를 만들었으나 이것으로는 전문화된 군대를 갖출 수 없었다. 명대 후기의 군대 편제는 위소제와 위소제의 보안책인 영병제, 그리고 이를 더 보완하기 위해 班軍 등이 있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병사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해져 군인에서 그 정체성이 班工 즉 노동자로 변했다. 그들의 월급은 형편없고 사회적 지위도 낮아 생활고에 시달려 오히려 백성을 약탈하는 바람에 사회의 화근이 되었다. 병사 뿐만 아니라 군관들 역시 문제가 많았는데 엄격하고 효율적인 선발제도가 없어 그 수는 계속 증가하는데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자가 많아졌다.
3.명대 말 군사 개혁운동으로 도전에 맞서다. 문제가 많은 군사체개를 개혁하기 위해 ‘사대부’들이 병법을 언급하고 병서를 출간한다. 무기 면에서는 포르투갈의 총기 제작자를 초빙해 서양대포를 만들도록 했고 홍이포를 모방한 성능 좋은 대포를 제작 했다. 우수한 병사를 위해서는 건강한 신체와 최소한의 문자를 해독하고 간단한 셈 능력을 지닌 자를 선발 하고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였다. 이런 다음 훈련과 엄격한 기율로 병사들의 수준을 높인 후 유기적으로 결합 할 수 있는 전투편제를 개편 하였다.
4. 명대 후기 지식인들이 군사 개혁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운동의 결과 명 조정의 운명을 되돌리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대표적인 세 군대를 살펴보면 첫째 척계광이 세운 척가군은 1559년 저장 이우에서 병사 3천으로 창설되어 3년 뒤 1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남북을 오가며 왜구, 몽골과의 전투에서 수차례 숭전보를 올렸다. 척가군 병사가 중심이 된 절병은 명대 후기의 군사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 손승종이 세운 요동 차영. 차영은 군사 개혁의 중요한 성과이며 선진 화기로 무장 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후금의 군대가 베이징 성 아래까지 몰려왔을 때 수도 방어를 하기도 했다. 셋째 서광계 등이 세운 덩저우 화포영. 화포영은 대포부대로 최정예 부대 이다. 이 시기 군사 개혁운동이 화기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린 점도 중요하다. 신식부대를 창설한 것 외에도 기존의 부대를 개조해서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개혁도 했다. 민간에서도 개혁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성과가 있었는데 푸젠 해상에서 활동하던 정지룡 집단의 세력이다. 이 집단은 8종류의 전함을 갖추고 신식무기로 무장하여 청초기 청 조정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명대 후기에 시행된 군사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한계가 있었다. 언급한 개혁 군대의 규모가 작았다. 결국 청군에게 위협적이지 못했다. 또한 기존의 부대와 신식 부대가 섞이다 보니 잡음이 끊이지 않을뿐더러 지휘체계는 매우 고루하고 낙후하여 장수들의 무능이 그대로 드러났다.
명대가 초기 경제 세계화 시대였다고는 하나 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제 세계화의 영향을 그 닥 받은 것 같지 않은 유목민족인 후금에게 망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6장에서 명대의 군제 그 이상을 바란다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