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_마무리 에세이] 고도로 발달한 오컬트는 힐링 컨텐츠와 구분할 수 없다 ―영화 <유전>, <미드소마>와 만나는 니체 에레혼
1. 그대들은 일찍이 '한 번, 또 한 번'을 원한 적이 있는가? 그대들이 일찍이 "네가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원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며,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실로 묶여 있고, 모든 것이 사랑에 빠져있다.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다. 그대 영원한 자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그리고 항상 사랑하라. 그리고 비애에 대고 "사라져라. 하지만 때가 되면 돌아오라!"라고 말하라. 모든 기쁨은 영원을 원하기 때문이다. _"밤에 방랑하는 자의 노래-1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아리 애스터의 영화는 관객들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는 해석할 거리를 많이 준다는 의미이면서, 감독이 관객의 찝찝한 기분을 자극하여 영화를 곱씹게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는 엔딩신과 함께 다시 시작되는 듯한 착각을 유발한다. 2018년도 영화 <유전>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피터의 몸에 '파이몬'이라는 악마가 깃드는 의식이 성공하며, 악마 숭배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미래를 예고한다. 2019년 작품 <미드소마>는 어떤가? 가족을 모두 잃고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한 대니는 호르가 마을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영화는 활짝 웃는 대니의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마무리된다.
(위: <유전>의 피터 / 아래: <미드소마>의 대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더라도, 주인공의 삶이 그를 지켜본 이의 머리 속에서 이어지는 체험. 아리 애스터 영화 속 등장인물의 운명은 기구하기에, 관객들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좋든 싫든) 몰입하게 된다. <유전>에서 피터는 부주의 사고로 동생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자신에게 악마 빙의 의식을 하려는 이들로 인해 피폐해진다. <미드소마> 속 대니는 우울증에 걸린 동생이 부모님과 함께 독극물 자살을 감행한 현실을 피해 스웨덴 호르가 마을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함께 마을로 동행한 친구들을 미드소마 의식의 제물로 잃고 남자친구의 외도를 목격하게 된다. 두 인물이 처한 현실 상황에서는 차라리 스스로를 잃어버리거나(피터), 사이비 컬트 종교 집단의 일원으로 환대를 받는(대니) 상황이 낫겠구나 싶다. 이처럼 영화가 끝나도 이야기가 계속되는 서사구조는 <유전>이나 <미드소마> 같은 오컬트 영화의 특징이다. 오컬트 장르는 초월적 존재가 개인/집단의 운명에 개입하는 세계관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들은 좀처럼 잘 퇴치되지 않는다. 굳이 고등학생의 몸을 선택하여 이승에 강림하려고 하는 <검은 사제들>의 악마, 지구상의 모든 악령과 악귀를 총동원하여 청년들을 납치한 뒤 거대신에게 바치는 <케빈 인 더 우즈>의 연구소 등. 이와 같은 강력한 존재는 영화 말미에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가장 마지막 씬에 줄곧 부활한다. 재미있는 점은 음모론 가득한 오컬트 장르물이 불황기에 성행한다는 사실이다. 악마 숭배나 귀신 퇴치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유행하는 말세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관객들은 오컬트물을 보며 시궁창처럼 변한 현실이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힘 때문이라고 감정 이입할 수 있다. 이처럼 오컬트를 소비하며 음모론에 열광하는 심리는, 비뚤어진 욕망과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이란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대신 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오컬트 장르는 팍팍한 현실에서 더욱 수동적인 존재가 되고픈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나를 조종한다면 괴로울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현실 세계의 고민은 머리에 파고들 틈이 없겠군' 하고 말이다. 2. 내 일찍이 한 인간의 낯에서 그토록 심한 구역질과 창백한 공포를 본 적이 있던가? 그(양치기)가 자고 있었던 걸까? 그때 뱀이 목구멍으로 기어들어 꽉 물어버린 것이다. …… "대가리를 물어뜯어라, 물어뜯어!" 이렇게 내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 목구멍으로 뱀이 기어든 그 양치기는 누구인가? 가장 무겁고 가장 시커먼 것 일체가 목구멍으로 기어들게 될 그 인간은 누구인가? 여하튼 그 양치기는 내 고함소리가 알려준 대로 물어뜯었다. …… 더 이상 양치기도 아니고 여느 사람도 아닌, 변화한 자, 빛에 둘러싸인 자가 되어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상에 그가 웃듯이 웃어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_"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안락하지만 나를 갉아먹는 대안 세계' 대 '문제투성이 현실'. 피터와 대니는 두 가지 선택지에서 전자를 택한 이들이다. 이들에게 퇴마 의식이나 사이비 집단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강령 따위가 필요할까? 짐작하건대 피터와 대니는 자신들의 달라진 상황에 더 만족할 확률이 높다. 피터와 대니 모두 거악의 손아귀를 벗어나면 가족이 몰살당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아리 애스터는 이 인물들을 위해 현실을 외면할 수 있는 구실을 영화 속에 마련해 놓고 관객들을 향해 이죽거린다. 이런 이유 탓에 상당수의 관객들이 아리 애스터의 영화를 보고 나서 불쾌감을 표하는지 모른다. 오컬트 장르가 애초에 공포 영화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기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장르라지만, 아리 애스터의 작품을 보고 나면 다른 차원의 혐오스러운 감정과 마주해야 한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현실 사회의 도덕이 적용되지 않는 아리 애스터 세계관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악마나 이교도 집단이 처단되는 권선징악 서사는 기대할 수 없다. 이 '빌런'들은 오히려 주인공을 구원하는 존재처럼 그려질 뿐이다. <미드소마>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며 이 불쾌한 체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대니의 웃음 너머로 펼쳐지는 광경은 집이 불타는 장면이다. 그 집 안에는 애인과 자신의 친구들이 있다. 그녀는 화형식이 일어나기 전, 호르가 마을의 축제를 통해 왕으로 뽑힌다. 이 왕은 화형식의 마지막 제물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마을의 규율을 어겨 제물로 선정되었다.) 마을의 사람과 자신의 남자친구 크리스티안 중에 제물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니는 남자친구를 선택하게 된다. 대니의 선택은 외도를 저지른 크리스티안에 대한 복수이면서 동시에 대니가 호르가 마을을 마음 둘 곳으로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겉돌고 마을 사람들과 반목하고, 마을에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대니의 친구들과 달리, 대니는 호르가 마을에서 줄곧 편안함을 느끼고 자신의 트라우마(가족의 죽음)에 대한 위로를 받는다. 그러니까 <미드소마> 마지막 장면의 미소는 호르가에서 환대받기 이전 의기소침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대니의 모습과 대비되는 변화의 서막이다.
(<미드소마>에서 대니의 눈물을 보고 함께 우는 소리를 내며 공감하는 호르가 마을 사람들.)
마지막 장면의 기괴한 분위기를 두고 네티즌들이 '대니의 안전 이별', '대니를 위한 최고의 힐링' 운운하는 건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아리 애스터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주인공들이 이전 상황에서 변화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다는 부분이 아닐지. 이러한 해석마저도 여전히 궤변처럼 보이겠지만. 3. 어느 날 낮 혹은 밤에 악령 하나가 슬며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너는 지금 살고 있는 대로 그리고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이 삶을 다시 살아야 할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이 살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저 네 삶의 모든 고통과 모든 기쁨과 모든 생각과 모든 한숨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소한 일부터 중대한 일까지 전부 다 동일한 차례와 순서로 똑같이 반복될 것이다. 여기 나무들 사이의 거미와 달빛까지도 이 순간과 나 자신까지도 반복될 것이다.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계속해서 뒤집히고 또 뒤집힐 것이다. 그리고 작은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너 역시 함께 뒤집힐 것이다." _<즐거운 학문> 중에서 위 구절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구절일 것이다. 오컬트 장르 팬인 나는 니체의 말을 보고서 악마가 등장하여 사람을 꾀는 장르 영화를 떠올렸다. 그러나 니체가 이런 상황을 가정한 데에는 (당연히) 이런 장르물 작가로서의 야망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가정이 인간을 분류할 수 있는 거름망 역할을 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여기서 허무주의가 다가오는 것에 찬사를 보내지, 그것을 탓하지 않는다. 나는 가장 큰 위기들 중의 하나, 즉 인간이 가장 깊은 자기 반성을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인간이 과연 이 위기에서 회복되는지, 인간이 과연 이런 위기를 지배하는지가 바로 그의 힘에 관한 문제이며, 위기의 지배는 가능한 일이다. _<유고> 중에서 니체의 부연 설명까지 보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내 자신이 위기를 지배하고 상황을 관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의구심이 든다. 삶의 허무 속에서도 최대한 현실을 버텨내겠지만, 고작 버티기가 니체가 이야기하는 위버멘쉬를 위한 결단은 도무지 아닐테니.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긍정적 상태를 꾸준하게 유지하는 삶.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나면 영원회귀와 위버맨쉬의 관계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냄새는 맡을 정도는 되었으면 했는데, 여전히 니체의 말은 오리무중이다. (설상가상으로 영원회귀에 대한 논의는 철학 전공자들도 쉽사리 정의를 하지 못하고 니체의 어떤 글을 읽어보라고 추천만 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번 글을 쓰면서 <즐거운 학문> '악령의 선언' 구절을 보니 다시 들어오는 문구가 있었다. 영원회귀 가정 속에서 나는 고작 모래시계 속에 작은 알갱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번 독해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다. 아,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억겁의 세월을 되돌리는 건 내가 아니라 또 다른 존재였구나. 뒤늦은 발견은 오히려 모래 알갱이가 되든, 그 모래 알갱이보다 더 작은 입자의 무언가가 되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차피 내가 손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냥 시간 속에 실려 가면 그만. 엉뚱하게도 이런 깨달음 뒤에는 <유전>과 <미드소마>를 감상한 뒤에 들었던 상쾌한 기분이 길티 플레저는 아니라는 합리화에 이르렀다. 서브 컬쳐에 대한 탐닉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일은 언제나 떳떳하지 못하다. 그런데 그 덕질의 대상이 오컬트, 그것도 주인공의 가혹한 상황을 긍정해야만 하는 영화라면? 심지어 나는 그들의 삶이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이 차라리 현실로 돌아오는 일보다 낫다는 데에 동조한다. 이러한 감상평을 대대적으로 공유하기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니체를 읽으면 읽을수록,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따라갈수록, 상당수의 오컬트 영화가 결국 삶에 대한 은유를 속된(?) 방식으로 재현하는 장르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나아지지 않고 변화 없는 삶이라도 정체 불명의 존재가 나를 쥐고 흔들지도 않는 잔잔한 인생이라면 그래도 충실하게 살아볼 만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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