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5 올 한 해 함께한 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라 2023년을 니체와 시작했다. 매주 금요일 아침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삼월, 성연, 슈슈, 에레혼과 읽었다. 자 이제 한 시간 후면 이 세미나는 끝난다. 뭔가 멋지게 끝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이번 주 내내하고 있었지만 이제야 노트북 앞에 앉았다. -모든 것은 꺽이고 모든 것은 새로 이어진다. 존재의 똑같은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바퀴는 이렇듯 자신에게 신실하다. 매 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구른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이라는 오솔길은 굽어 있다. (제3부 건강을 되찾은자) 위버멘쉬는 슈퍼맨이 아니다. 능력자가 아니다. 위버네쉬는 실존방식 아니 실천방식이다. 능력자가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극복의 과정에 존재하겠다는 의지이다. 초월적 세계로 향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세계를 긍정하겠다는 것이다. 선악의 본질이나 가치의 구분을 버리고 자기만의 기준을 갖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자유인이 되고자 한다. 현대사회에 공식적으로 노예는 사라졌지만 노예의 생활방식은 여전히 존재한다. 출퇴근 하는 노예가 된 것이다. 예전 노예는 의식주를 주인이 책임지는 형태였다면 지금은 자신의 생활은 자기가 선택한다고 믿기에 노예가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신(돈)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의 모든 물건은 자본으로 돈으로 환산해야 가치를 인정한다. 활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사람의 연봉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매긴다. 그래서 언제나 유명 야구선수나 축구선수의 천문학적 몸값은 언제나 이슈가 된다. 혁명이란 방법부터 혁명적이여야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위버멘쉬는 과정이다. 나오미 울프만의 말처럼 싸우는 과정 자체가 이 싸움을 통하여 획득하고자 하는 사회모습을 닮아야 한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속이는 자를 따로 경계하지 않기 위해 나를 속이도록 놔둔다는 것.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인간적 영리함이다.(첫번째 영리함은 사람들 틈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온갖 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 틈에 머무를 수 있다. 이 영리함은 범위를 넓혀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방어적 태세 일체를 버리는 것으로 확대된다. 방어를 위한 직접적 대응이나 반박보다 자신의 현명함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그 자체로 현명한 일이자 효과도 더 크다. 물론 이것은 지혜의 정도가 상대보다 ‘더 높고 더 깊은’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나의 또 다른 인간적 영리함은 이것이니, 긍지에 찬 자들보다는 허영기 있는 자들을 더 돌보는 것이다.(두 번째 영리함은 약한 자를 강한 자보다 더 신중하게 돌보는 것이다. 허영기는 약자의 것이고 긍지는 강자의 것이다. 이유 중 하나는 약자의 허영기가 상처 입으면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덕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이 진정한 덕이라면, 자 봐라. 허영기 있는 자도 자신의 겸손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나의 세 번째 영리함은 이것이니, 비록 그대들이 두려워한다 해도 악인들의 눈길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번째 영리함은 적수를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맞는 적수를 찾아내고 더 강한 적수를 찾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적=진정한 벗’의 싸움을 하여 자신의 성장과 상대의 성장을 같이 도모할 수 있다. 제2부 인간적 영리함에 대하여 메세지를 반박 할 수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논리가 맞기에 반박이 불가할 때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뜻이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누가 메신저를 공격하느냐이다. 메시지에 관계된 사람이 메신저를 공격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메세지나 메신저에 대해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메신저를 공격하는 것이 문제다. 그게 문제를 벗어난 여론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니체의 인간적 영리함이다. 누구의 논리인가를 찾아야한다. 개념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논리적이라고 생각되면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논리를 누가 이끄는 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 누가 자신의 전 역량과 유연함과 싸움의 기술을 발휘하며 전력을 다하는지. 적을 경멸한다면 싸움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나는 그 논리를 감당할 수 있는지 인정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회의(懷疑)해야 한다.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를 극복을 위해서 나는 나를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는지 실천해 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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