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철학/SF] 살인마처럼 생각하기, 외계인처럼 생각하기2024-01-23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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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샤비로, 『탈인지』(안호성 역, 갈무리, 2022), 5-6장. 


「3장 아바타처럼 생각하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다. “잠재성이나 실재적 가능태는 단순한 논리적 가능성과 달리 현재 속에 실제로 존재한다”(111). 5장 살인마처럼 생각하기」의 후경이 되는 마이클 스완윅의 야생 정신」(1998)의 세계가 그러하다. 지식과 기술은 숙련의 가능태가 아니라 전기화학적 자극으로 가능한 현실적 결과가 되었으며, 사랑 따위의 감정적 구성요소들은 통제되지 않은 것들로 사과되어야 하는 세계다. 이 때문에 개인의 역량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품성이 문제가 되며, 이 세계의 인물들은 ‘최적화’라는 수술을 통해 기업에 부합하려 “자신의 정신적 과정에 관한 완전한 통찰”(196)을 얻기를 갈구한다. 야생 정신」의 주인공인 톰은 작중 세계의 보통 인물들에서 벗어난다. 최적화에 저항하며 증강되지 않은 정신을 계속 가지려 한다. 



샤비로가 「야생 정신」에서 주목하는 것은 “모호함을 거부하기보다는 그것과 함께 살아가기를”(211) 원하는 톰의 모습이다. 최적화는 톰을 아내 살해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 가벼움과 평화를 얻게 할 것이지만 그래서 그를 “이전의 그러했던 나”(209)로 돌아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톰을 통해 평화나 완전함과 같이 으레 달성되거나 추구되어야 하는 행위 혹은 감정의 완수 상태에 대한 일종의 인식의 역전을 볼 수 있다. 최적화에 일종의 결함이 있지 않다, 바로 그 “결함이 없다는 것”(211)이 문제가 된다. 샤비로의 결론은 야생 정신」이 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을 어떤 추이나 대척의 쌍으로 보는 시야에서 한발 짝 더 나아가있다는 것이다. 인간 의식의 수축주의적 설명이라는 가능태가 현시된 세계를 부정하지 않되, 작중 “‘낡아빠진’ 세계”(213)에 휴머니즘의 자리를 만들어주며 모호함과 살아가기를 선택한 톰의 자리도 만들어준다. 


내가 생각하기에, 비교적 짧은 장인 5장 살인마처럼 생각하기」에서 샤비로의 성취는 탈인지를 주장하기 위한 자신의 논증과 함께 SF의 사고실험으로서의 리얼리즘적 기능에 대한 매력도 함께 제시하고 있는 데 있다. 샤비로는 야생 정신」은 기업과 노동자간의 위계관계가 분명한 계급중심의 계층화된 사회를 다룬다는 점에 몇 문단을 할애한다. 6장에서도 주효한 주제어인 유비는 야생정신」의 허구적 세계가 현실 세계를 어떻게 빗대고 있는지, 이로써 이 SF의 역시 주요한 비판적 렌즈가 무엇을 경유하여 향하고 있는지 이해가능하게 한다. 6장의 문단을 부분 인용하자면, “유비와 암시는 경험론적으로 시험될 수 없지만, . . . 과학소설이 추구하는 것이다”(236).


6장 외계인처럼 생각하기」는 피터 와츠의 『블라인드 사이트』(2006)를 통해 인간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에 대해 질문한다. 소설의 세계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 그 자체”가 “기계의 힘과 지능을 확장하기 위해서만 작동”하는 야생정신」에서 보다 극단적으로 변모한다(219). 주인공 시리 키튼이 너무 많은 기계 조각을 가졌다는 이유에서 우주선에 동행하고 있는 스핀델과 커닝햄을 “인간 존재자”로 여기는 데 어려움을 가졌다는 것이 그 예시다. 샤비로는 ‘어디까지가 (나라는) 인간인가?’ 또는 ‘어떤 점이 덜 통상적 인간이게 하는가’와 같은 인간 범주에 대한 변주들을 등장인물들로 짚어간다. 현대 의학적 용어로는 다중인격 장애로 보일 수전 제임스, 의식적인 나’와 동일시 될 수 없는 나, 그러니까 ‘이제 일어나야지’라고 의식하는 나와 그 전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나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만다 베이츠, 별종 흡혈귀인 주카 사라스티가 제시된다. 


『블라인드 사이트』에서 가장 통상적 인간에서 거리가 먼 인물이 시리다. 반사회적이고 공감의 감각이 없다는 까닭에서 시리야말로 이 장의 제목인 ‘외계인처럼 생각하기’에 적확히 부합한다. 이 극단적 자기-소외가 소위 인간적인 공감 대신 번역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너무나도 이질적인 외계인 훼방꾼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샤비로가 주목하기에, 이제 이 소설은 시리를 통해 훼방꾼들로 관점을 이동하며 고도로 지능적이지만 “자신들을 자아나 주체로서 인지하지 못한다”(252)로 나아간다. 의식은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고 여겨지는 요소다. 하지만 훼방꾼들은 “의식의 중심성과 가치에 관해 갖고 있는 인간중심적인 가정들을 뒤흔들어 놓는다”(259).


인간 사회로 돌아오는 중에 시리가 걱정하는 것은 인간 사회가 ‘의식 근절’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점이다. 이 의식에 관한 일종의 인간적 신화에 불충하는 데 샤비로는 쐐기를 박으며 본 장을 마무리한다. 그는 칸트가 미적 경험을 의식적이고 합리적 정신을 갖춰야 가능한 부산물로 본 데 이의를 제기하며 미학은 지성보다 감수성의 문제라고 말한다. 훼방꾼들이 예증했던 바, 의미론은 제거되었지만 통사론은 기능하고 있는 그들의 언어에 지성은 담겨있으나 목적은 없으며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샤비로는 동시에 “의식, 미학, 부적응성 및 역기능성은 함께 한다”(267)고 말한다. 의식만이 미학과 미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통상적인 인간다움을 통해 세계를 분별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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