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나의 배역을 만든 데에는
에레혼
아무리 소설이라도 그렇지
최근 유행하고 있는 드라마에서 ‘설정값’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은단오’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고, 고등학생이면서
이미 약혼자까지 있다. 심장병을 가지고 있어 몸이 약하기 때문에 늘 보호받아야 된다는 설정은 덤이다. 이런 클리셰가 그나마 용서되는 까닭은 그가 <비밀>이란 순정만화 속의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은단오는 우연치 않게
자신이 작품 속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자신에게 부여된 설정값이 과하다며 비웃는다. 요즘 시대에 누가 이런 뻔한 작품을 읽는단 말인가? 다행히 작가도
아주 바보가 아니라서 은단오는 ‘그 외 등장인물’에 속한, 엑스트라 중 엑스트라이다. 이후 은단오는─어떤 작가들이 보면 소름이 돋겠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바꾸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세미나와 비슷한 시기에 드라마가 시작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임대옥을 보면서도 작가가 이 캐릭터에 과한 설정값을 부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서부터 가보옥과 이어져 있으며, 병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대옥의 캐릭터는, 다 가진 사람이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련한 주인공으로써 손색이
없다. 심지어 작가는 대옥에게 글재주도 선물했다. 대옥이
쓴 시를 끝까지 읽어보지도 않고 주변 사람들이 감탄하는 모습(37회),
대옥이 쓴 국화시 3편이 모두 높은 평가를 받는 장면(38회)을 보면 과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심지어 대옥은 이렇게 칭찬을 받고도
자신의 작품이 별로라고 말하는 겸손까지 옵션으로 갖추고 있다.)
《홍루몽》을 캐릭터 하나만 놓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부당할 수 있다. 이 작품은 300년쯤 전에 쓰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보아도
인물 관계에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 설득력은 인물 사이의 긴장감에서 나온다. 재자가인이라는 구절처럼─이몽룡에게 성춘향이 있고, 로미오에게 줄리엣이
있듯이 보옥과 이어질 사람이 대옥뿐이었다면 이 작품이 이렇게까지 사랑받았을 리 없다. 보옥 주위에는
너무나 많은 ‘가인’이 있으며, 조설근은 특히 설보차를 강력한 라이벌로 끼워넣었다. 행여 독자들이 보차의 존재감을 잊을까,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빌려
이 점을 상기시킨다. 이번 회차에서도 보옥-대옥-보차의 관계를 암시하는 구절들이 등장하는데, 한번은 임대옥의 속마음을
통해
……금옥의 인연이란 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게 바로 그대와 내가 갖고 있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또 달리 보차라는 사람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p.292
그리고 또 한번은 가보옥의 입을 통해
“중이나 도사 같은 놈들의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어?
무슨 금과 옥의 인연이라고 떠드는 거야 난 오히려 목석의 인연을 말하겠어!”
p.375
이들의 운명이 엇갈릴 것임을 반복하여 보여주고 있다.
어떤 운명에 대항할 것인가
여기서 보옥이나 대옥이 단오처럼 작가에게 대드는 캐릭터로 나왔다면 정말 재밌었을텐데. 그런 플롯이었다면 청나라 말기 지식인들이 “왜 우리에게는 저들과 같은 소설(novel)이 없는
것입니까!” 하며 우는 소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는 각설하고,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보옥, 임대옥도 나름대로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습이 여러 번 나타난다. 사상운의 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보옥은 과거시험 준비도 하지 않고 경국치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p.290) 가보옥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도 불행한 일이거니와……이 화는 모두 옛사람에게로 미치는 것이니
사서를 제외하고 다른 책은 모두 불살라야 하는거야.”
p.366
전생부터 이어진 사이 아니랄까봐, 임대옥
역시 입신양명에 뜻을 두지 않은 보옥을 이해하는 대관원의 유일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p.366) 지위고하를
정하고 개개인의 정체성을 가두는 호칭을 없애자는 제안을 먼저 건내기도 한다.
“정녕 시모임을 만든다고 하면……우선 언니, 동생이니
시동생, 형수님이니 하는 호칭부터 없애야 비로소 속되지 않을 것 같아요.” p.391
흥미로운 점은 이런 캐릭터의 반항이 대관원의 문밖을 넘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엄밀히 말하면, 《홍루몽》은 주인공의 반항이 굳이 집밖을 넘어야
하는가 물어보는 듯하다. 조설근이 만든 대관원은 이미 작은 우주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보옥과 대옥의 삐딱한 태도를 그저 사춘기 청소년의 치기어린 모습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삼국지나 수호전의 인물들처럼 세계를 뒤집고 탐관오리를 혼내 줘야만 훌륭한 사람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부터
바꿔 나갈 수 있을 때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홍루몽》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한 ‘꿈보다 해몽’ 되겠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운명에
맞설텐데
“하늘이 나를 만든 데에는 반드시 쓰일 곳이 있다는 것.(天生我材必有用)” 이백이 지은
<장진주>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 자신의 처지가 위로 받는 기분이라고 한다. 저 부분만 떼놓고 보면 <장진주>는 힐링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백이 바로 뒷구절에서 “천금은 다 쓰면 또 다시 생기니 … 한번 마시면 삼백잔은 마셔야지!”라고 말한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시가 진행되면 “마냥 취해
깨고 싶지 않다”는 구절이 등장하는가 하면, 마지막에는 급기야 대작하는 상대방에게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겠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장진주>에서는 하늘로부터 생명을 얻은 내가 긍정적인 곳에 쓰일지, 부정적인
곳에 쓰일지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걸 생각하는 것은 골치 아프니 일단 술이나 먹자는 이백 선생의
혜안(?)이 돋보이는 시이다.
《홍루몽》 이야기를 하려고 잠시 <장진주>를 건드려봤다. 다시 돌아와서,
머리 위 먼 곳에서 내 운명을 이미 정했으니 모든 것은 내 소관 밖이라는 점은 가보옥과 금릉십이차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앞에서 《홍루몽》의 등장인물들이 소설이라는 공간을 자각했다면 어땠을까 농담삼아 이야기를 던지기도 했지만, 이런 설정은 조설근의 ‘큰 그림’에서 보면 가당치 않은 말이다. 사실
작가는 주인공에게 끝을 이미 다 알려주었다. 5회 부분에서 아예 경환警幻이라는 이름의 선녀가 등장하여
금릉십이차의 운명에 대해 강력한 힌트를 주지만 보옥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에게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작가와 독자이니까, 보옥과 대옥은 ‘운명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대항할 것인가’ 하는 이지선다 선택지조차 쥐고 있지 못하다..
조설근이 등장인물에게 연민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서두부터 아예 운명을 정해 놓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다름아닌 작가인데, 괘씸해서라도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등장인물이
봉건사회의 규칙을 깨뜨리거나 가부장제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고, 일어날 수도 없기에 《홍루몽》에 짙게 배인 우울한 정서, 허무한 분위기는 더욱 강화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