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통시기 중국의 안과 밖_3/4장 발제
상상의 공동체는 어떻게 제국이 되었나
고대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중국’이란 대체로 진한이 기틀을 닦았던 그 핵심지역이었다. 멀고 먼 변경 지대, 민족, 자연, 풍속이 다른 지역들은 “얻어도 이득이 되지 않고, 버려도 손해가 되지 않는 지역”이었을 뿐이다. 특히 서역이 그랬다. 서역처럼 중국에서 ‘외국’으로 변하는 상황은 중국 역사에서 적지 않다. 송대의 서남과 서북 지역도 그 예 중 하나다. 송 태조는 ‘내가 거주하는 자리 밖은 모두 타인의 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안’에서 ‘밖’으로 변하는 일은 제국에 굴욕감과 좌절감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은 아니었다. 안남도 마찬가지였다. 송나라는 안남 정국을 장악하고 싶었으나 황제가 손쓸 수 없는 머나먼 곳에 있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원래 진한과 수당의 군현이었던 이곳은 결국 정식으로 외국 ‘안남’이 되었으니 ‘중국’이 ‘외국’으로 변한 것이다. 이 ‘외국’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니 원명청 삼대 내내 줄곧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거자오광은 이는 “매우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지리학자들은 공간적으로 가장 넓었던 시대를 가지고 그것이 중국의 필연적인 강역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없고, 역사학자들도 ‘현재 시각에서 역사 쓰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형성된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거자오광은 ‘역사과정’에 주목한다. ‘역사과정’은 ‘중국’을 거슬러 올라갈 때 학자들이 응당 주의해야 하는 문제이다. ‘역사과정’을 분리한다면 이는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학이 아니라 단지 현재 중국을 위해 합법성을 추구하는 정치학일 뿐이다. 기나긴 역사과정 속에서 어떤 지역은 ‘외국’에서 ‘중국’으로 변했고, 어떤 곳은 ‘중국’에서 ‘외국’으로 변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분열되었다 통합되었다 하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다. 다만 고대 중화제국은 좀 특별한 점이 있었다. ‘중국’은 하나의 민족적 공동체 의식을 지닌 문화적 상징이며, 문화와 풍습이 상대적으로 동일한 사회이자 하나의 문화적 공동체로서 길고 긴 역사과정 중 분명 상당히 명확한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했다. 문제는 이 ‘중국’이 어떻게 지속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거자오광은 제도, 문명과 사회라는 세 가지를 들어 그 지속의 바탕을 설명한다. 첫 번째는 제도. 진은 중국을 통일하고 군현제를 시행하면서 각기 달랐던 여섯 나라를 문자, 화폐, 행정, 법률, 도량형과 교통에 있어 동일하게 통일하였다. 이를 통해 하나의 통합된 ‘국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역대 제국 강역의 크기, 민족 구성, 왕족의 구조는 끊임없이 변화했지만, 정치-문화의 핵심 구역은 이러한 동일화된 제도의 형성으로 인해 시종 변하지 않는 측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문화이다. 진한 이래로 중국의 지식, 사상과 신앙 세계는 점점 하나의 명확하고 안정적인 문화적 전통을 만들어간다. 황제가 주도하는 국가의 제사는 하나의 신성 신앙을 형성하였고 역사적 글쓰기도 하나의 공통된 역사를 만들었다. 베네딕트 앤더슨에 의하면, 어떤 공간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통일된 제국의 영향 아래서 문화, 신앙과 역사를 동일시할 때 그들은 자신이 하나의 문화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고 한다. 그로 인해 하나의 민족이 되고 하나의 국가를 이루게 된다고 상상하게 된다는 것. 민족주의보다 먼저 출현한 이러한 문화적 체계는 민족주의를 낳게 되고 동시에 민족주의 형성의 배경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의식과 동일한 정서의 발생을 촉진할 뿐 아니라 진정한 국가를 ‘창조’해내게 된다. 한무제의 군존신비, 삼강오륜, 예법 겸비 등도 이러한 사상문화 통일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공통의 신성 신앙도 빼놓을 수 없다. 진대에서 한대까지 국가의 제사 체계가 완비되었고, 경전을 그 신성성의 근거로 삼았다. 게다가 공통의 역사서술로 일맥상통한 계보까지 만들었다. 여러 역사 저작 속에서 ‘중국’이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는 사람이 쓴 것이지만 역사가 일단 기술되고 나면 이는 정체성을 응집하는 거대한 힘을 지니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세 번째는 사회이다. 이러한 문명을 확산하고 실천했던 사대부들은 점자 하나의 계층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동일한 국가 관념을 지니고, 사회적으로는 동일한 목소리는 내는 집단을 형성했으며 사상적으로는 공통적인 유가 윤리를 주창했다. 과거시험으로 인해 더욱 방대한 계층이 되면서 지배 민족과 왕조가 어떻게 변화하건 그들은 가족의 계보, 사당의 제사, 지방행정 참여 등의 방식을 통해 종족 네트워크로 지역사회를 장악했다. 때문에 진한시대 이후 청말 이전까지 제국의 통치자는 계속 바뀌었지만 전통 중국의 핵심지역, 지방사회는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제도, 문명, 사회 이 세 가지 요소는 ‘중국’을 구성하고 ‘제국’, ‘왕조’의 기초를 넘어서서 고대 제국 시기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핵심 지역에 마치 근대국가와 같은 제도, 문화와 사회적 동질성을 드러나게 하였다. 그러나 한족 중국의 정치-문화 또한 모든 제국의 영역에 다 미치지는 않았다. 특히 강역의 분열과 통합은 일정하지 않았고 영토의 축소와 확대도 변화무쌍했다. 그래서 역사 속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현재의 중국 영토에 근거해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보다는 역사에 근거해서 중국의 강역에 관해 서술하는 것이 낫다. 현대의 민족 관념에 따라 역사의 서술을 진행하지 않을 때 역사는 현대의 국경을 넘어설 수 있다. 하나의 중심 국가만이 있는 역사서술은 시종 역사 글쓰기에서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게 된다. 중심은 종종 뚜렷하고 변경은 늘 모호하다. 거자오광은 ‘주변에서 중국을 바라보기’를 권장하고 또한 ‘주변에서 일본 바라보기’, ‘주변에서 한국 바라보기’ 등을 주장한다. 상호 교차하는 주변 지역 속에서 새롭게 역사를 바라보게 되면 아마 우리는 다른 역사적 풍경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저자는 전통 중화 제국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것은 민족을 뛰어넘는 다문화적 전통 제국이었다. 하지만 전통 제국이 현대 국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이 ‘중국’이라 불리는 정치-문화 핵심 구역은 주변을 블랙홀처럼 삼켜버렸다. 근대 중국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이상하고 복잡한 상황이 출현했다는 것. ‘천하에서 만국으로’와 ‘사예를 중화로 포섭하는’ 이 두 가지 맥락이 서로 뒤엉킨 것이다. 이러한 전환의 결과는 무엇일까. 중심은 안정적이고 주변은 모호한 ‘중화 제국’의 위에는 ‘천하의 중심’, ‘경계가 없는 대국’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이 때문에 줄곧 중국은 자신을 천하 제국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경계 없는 ‘제국’ 의식 속에 유한한 ‘국가’ 관념이 들어 있고, 유한한 ‘국가’ 인식 속에 경계 없는 ‘제국’의 상상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상의 ‘제국’이 현실의 ‘국가’에서 어떻게 나타날지 계속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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