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7 <생동하는 물질> 1장 사물들의 힘 발제_아라차
당신은 오늘 어떤 쓰레기를 마주했는가
배수로에 뭉쳐있는 장갑, 꽃가루, 쥐, 병마개, 나뭇가지가 햇빛을 받아 드러나고 있다. 이 사물들(의 배치)은 누군가에게 정동을 촉발한다. 인간 주체가 부여한 맥락으로는 온전히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생생한 실체로서 말이다. 저자는 이 쓰레기 더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오른 ‘사물-권력’이란 무엇인지 들여다보겠다는 것.
먼저, 카프카의 짧은 소설 <가장의 근심>의 주인공인 오드라덱을 주목해 보자. 오드라덱은 실을 묶은 실패인데, 달리고 웃을 수 있다. 왜소해서 그를 어린아이처럼 대하게 만든다. 이름이 뭐니? ‘오드라덱이요’, 어디에 사니? 그는 웃으며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요’라고 말한다. 오드라덱의 웃음은 “폐가 없이도 나올 수 있는” 웃음이다. 나무이지만 활기 넘치는, 언어적이지만 식물이기도 하고, 생기가 넘치지만 무력한 오드라덱.
저자는 살인 재판의 배심원으로 참여했다가 오드라덱과 비슷한 무엇가를 본다. 접착제로 막힌 금속제 뚜껑을 지닌 작은 유리병, 화약 잔여물 추출검사 장치이다. 이는 피고가 잡고 있던 총에 남은 지문을 담아놓은 것이다. 이 행위소(브뤼노 라투르의 용어로, 행위의 원천을 가리킨다. 인간일 수도, 비인간일 수도 있고, 객체도 주체도 아닌, 간섭자일 수 있다. 행위자라는 주체 중심적인 언어를 대체하는 단어)는 배심원들에게 힘을 발휘한다. 물론 이런 살인의 증거와 배수로의 쓰레기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차이가 “평평해질 필요가 있으며, 존재의 위계로서 해석되기 보다는 병치로서 수평적으로 독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쓰레기 더미, 오드라덱, 지문 추출 장치. 이들이 활기를 띤다는 것은 이를 보는 사람의 성질이 아닐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활동 그 자체가, 이들 물질을 구성했던 생기적인 물질성의 한 사례라고 말한다. 저자의 목표는 “물질성 그 자체의 생기에 대한 논의를 풍부하게 진행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비인간 신체를 강조하고 이들이 단순한 객체가 아닌 행위소로 묘사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질을 능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일은 인간 행위소의 지위를 재조정하는 작업을 요구한다.
인간의 권력은 그 자체로 일종의 사물-권력이다. 인간은 뼈의 무기질이나 피에 있는 철분, 뉴런의 전기 신호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것들은 모두 능동적인 영혼이나 마음같은 비물질적인 존재의 지시를 받는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수단으로 여겨진다. 물질들이 활기를 지닌 자기조직적인 물질이라는 입장은 아직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500억 년 동안 세상에 군림했던 연조직(젤라틴, 에어로졸, 근육, 신경)의 무기화 과정과 생명체를 구성하는 새로운 물질인 뼈가 창발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라.(진화론자 데 란데의 이야기) “길고도 느린 진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무기 물질은 자발적 행위를 수행하는 자신의 엄청난 능력과 함께, 스스로 움직이고 주변을 뒤흔드는 자로서, 능동적인 권력으로서,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 자신의 산물로서 나타나게 되었다.”(55p) 우리는 걷고 말하는 무기질이다.
많은 이들이 인간의 특별함과 고유함을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저자의 관점이 인간을 단순한 물건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라며 비판한다. 이같은 비판은 유효하다. 인간 대 인간의 유해한 도구화(불법체류자, 여성, 가난한 사람, 아동 등 약자 착취)를 비난할 도덕적 근거가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를 비롯한 생기론적 유물론자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사물들 사이의 본질적인 위계 질서라는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는 윤리적 실천 방식은 무엇일까? 니체와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수용하는 생기론적 유물론자들은 생리학적 기술어를 도덕적 기술어보다 선호하는데, 이는 도덕주의가 그 자체로 불필요한 인간 고통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과 안정을 증진시키기 위해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성의 지위를 격상하는 방법은 어떤가? 각각의 인간은 경이롭게 생동하는 동시에 위험스럽게 생동하는 물질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합성체이다. 만약 물질이 그 자체로 활력을 지닌다면 주체와 객체 사이는 줄어들고, 저항력과 행위성이 두드러지고(사물 권력이 두드러지고), 모든 신체는 단순한 대상 이상이 된다. 생기적 유물론은 인간성에 대한 특수한 모델(유럽-아메리칸, 부르주아, 신본주의 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칸트 식 세계에서 고통받는 인간에게 안정망을 제공할 수 있다. 인간 착취나 억압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이같은 접근을 통해 모든 신체가 관계들의 빽빽한 네트워크 속에서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생기적 유물론자에게 윤리는 생기적 물질성에 인간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생기적 물질성이며 그것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우리의 우선 과제는 비인간의 생기를 식별하는 능력을 계발하는 것, 그것에 지각적으로 열려있는 것이다. 미적인 운동(감각적 주의), 비현실적인 상상력 훈련, 어릿광대짓을 하는 용기 같은 것이 필요하다(아도르노의 윤리학). 아도르노는 물질적인 힘을 절대적인 것에 대한 흐릿한 약속이라는 점에서 영적인 힘을 설명하려고 했다. 브뤼노 라투르는 여기는 사물에 깃든 패티쉬를 인정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상한 세계라고 말했다.
이런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의 방법은 이렇다. “이에 대한 전략 중 하나는 ‘미신, 애니미즘, 생기론, 의인관 그리고 다른 전근대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철학을 다시 살펴보고 그것에 잠시 물드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생기적 유물론은 철저히 무신론적이라는 점은 잊지 말자.
잠시 에피쿠로스주의 신봉자였던 루크레티우스의 고대 원자론을 보자. 루크레티우스는 허공으로 떨어지는 신체에 대해, 배치를 이뤘다가 배치에서 떨어지는 신체에 대해, 각각이 서로에게 깃드는 신체에 대해 말한다. 아주 불특정한 시간 불특정한 장소에서 자기 자리로부터 조금 비껴난 어떤 것. 이런 일탈이 의미하는 것은 세계가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 우연이라는 요소가 사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물이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 생기 또는 에너지가 있다는 것, 독립적인 작용과 저항의 순간들을 모두 긍정하는 것이다. 즉, 사물-권력을 긍정하는 것이다. 사물-권력은 생명-물질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사고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실존 안에는 그 어떤 부정도 담겨 있지 않다. 저자가 물질의 생기를 다루는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내 안에서 혹은 세계 안에서 어떤 효과가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것, 대상에 매료되는 그 순간에 조금 더 머무르려 노력해 보는 것, 그래서 생겨나는 감각에 그 어떤 부정도 없다는 점을 잠시 믿어보며(페티시화) 발제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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