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결론 없는 결론을 향하여 에레혼
‘다른 지역이라 발생하는 차이가 있어요.’ 중국에 대한 질문에 가장 빈번하게 하는 대답이 아닐까 싶다. ‘베이징은 이렇게 하는데 상하이는 왜 그럴까요?’ ‘광저우는 이런데 선전은 어떨까요?’ 이와 같은 물음을 들을 때마다 그건 다른 도시라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질문에서 언급된 지역들은 대도시라는 특징만 겹칠 뿐 사실상 완전히 다른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지 말라. 굳이 부연할 필요조차 없는 상식의 영역이다. 중국에 대한 논의에서는 이 판단이 흐려진다. 많은 이들이 중국을 한 묶음으로 이해하려 한다. 다른 국가에 대해서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도쿄 사람들과 오사카 사람들이 어떤 성향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유머글이 종종 올라오기도 한다. 같은 파리 안에서도 구역별로 분위기가 다르다는 논의와 그 이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흥미를 갖는다. 유독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만 지역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다는 상식선의 이야기를 반복해야 한다.
도시와 도시간의 비교에서만 이런 일이 발생하겠는가? 중국의 거대 도시는 우리나라 웬만한 도의 면적과 인구에 맞먹는다. 한 지역 안에서도 편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2016년도에 베이징에 놀러갔을 때 지인이 해준 이야기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중국의 명문대와 유명 기업들이 즐비한 거리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쪽방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민공들이나 배달 및 서비스직 노동자들의 임시 거처처럼 활용되는 숙소라고 한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또 다른 대도시인 상하이를 예로 들어보자. 상하이, 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경제 수도라는 키워드일 것이다. 강변을 따라 이어진 고층 빌딩과 도회적 풍경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터. 그러나 첨단 도시로서 상하이의 정체성이 형성된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 이 도시는 중국 공산당의 발원지이자 항일 투사들의 항쟁지로 이름을 떨쳤다. 그보다 더 과거로 시간을 돌리면 상하이는 조그마한 어촌마을에 불과헀다.
최근 상하이의 도시 정체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다. 올해 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상하이에서 급증하자, 이 도시를 봉쇄해야 한다는 여론이 발생했다. 그러나 상하이 방역부서는 ‘상하이의 경제 기능을 마비시키는 봉쇄는 곧 중국 경제에 대한 타격’이라는 말로, 봉쇄설을 일축했다.
“(방역을 위해) 사흘에서 닷새정도 봉쇄를 결심하면 그만이라고, 일주일 정도 봉쇄하면 안되냐고 합니다. (이에 대해 답을 말하자면) 불가능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상하이는, 우리의 이 도시는 상하이 인민들만의 상하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하이 시민들은 이런 대국적 시야를 갖춰야 합니다.”
_2022년 3월 상하이 방역 담당자 우판 교수의 말
결론은 다들 아는 바와 같다. 상하이는 봉쇄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불편과 생계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하이 거주민들이 겪는 문제는 봉쇄가 풀리는 시점이 되자 두드러졌다. 방역당국은 상하이 봉쇄 해제 며칠 전부터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었다. 이 조치는 PCR 검사 결과와 도시 이동 허가증을 전제로 하기에 탁상공론처럼 보였다. 허가증을 받으려면 봉쇄가 해제되기 전까지 상하이에 돌아올 수 없으며, 다시 돌아올 때에도 시설 격리를 진행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정책이 시행되니 예상을 벗어나는 사건이 생겼다. 상하이 기차역에는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것이다. 기차를 타기 위해 줄은 선 사람 대부분은 상하이인이 아니라 외지에서 상하이로 일은 하러 온 이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일용직 업무, 플랫폼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지역에서 상하이로 온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도시 봉쇄가 생계에 큰 지장을 주는 사건이었다. 당분간 상하이로 돌아올 수 없을지언정, 움직일 수 있을 때 상하이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좌) 상하이 기차역에 진입하기 위해 줄은 선 사람들 / (우) 봉쇄 기간 상하이 기차역의 풍경>
외지인들이 빠져나간 상하이는 인력난 문제가 발생했을까? 실제 도시가 입은 타격은 크지 않다. 상하이 밖으로 나간 사람만큼, 다시 일자리를 구하러 상하이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상하이의 서비스직과 플랫폼 노동은 도시 바깥 사람들로 충원된다.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어떤 드라마의 대사는 이 도시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너는 상하이가 이민자의 도시라서 모두를 품는다고 했지. 꿈을 품었다면, 추구하는 게 있고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상하이에서 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어.” _드라마 <이지파생활理智派生活>의 대사
대사에서 ‘모두를 품는다’는 구절의 원문은 ‘해납백천海納百川(바다는 수백줄기의 냇물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다는 뜻)’이다. 허나 현실은 드라마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상하이는 수많은 물줄기를 받아주는 도시이지만 그들을 포용하고 보듬지는 않는다. 상하이 대탈출의 광경을 보고 중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역시 상하이는 외지인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드라마 대사처럼 상하이의 외지인 비율이 높을 수는 있어도, 이 도시가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맘 편히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코로나 방역 체계 아래 한없이 자유로워보이는 상하이의 이미지가 약자를 방임하는 도시의 냉엄한 풍광으로 역전되어 버렸다.
<2022년 여름, 입주할 집을 구하면서 실제 목격한 장면. 이전 거주자의 모든 짐이 그대로 놓여있다. 상하이 봉쇄 해제 후 몸만 빠져나가는 식으로 사진 속의 집에서 나간 듯하다.>
상하이의 여러 층위를 일일이 읊자면 밤을 새도 모자랄 지경이다. 중국에서 장기간 체류한 경험을 통해 얻는 감상은 대체로 비슷했다. 어느 지역이라도 그 도시만의 개성이 있으며, 한 지역에서도 다양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어떤 지역을 방문하고, 어떤 중국인을 만나도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이곳 또한 고유의 특색이 있겠거니’ 하는 생각은 꽤 잘 들어맞는다.
중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하니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분이 있었다. 중국 한 지역에 오래 있다 보면 다른 지역에도 오래 있던 것 같은 효과를 보게 된다고.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는데, 이제서야 속뜻을 깨닫게 된 듯하다. 중국은 어느 지역이든 내가 조금 본 것으로 일반화할 수 없는 다양한 요소로 가득하다. 아마 광저우도, 선전도, 베이징도 각 도시별로 여러 가지 면모를 갖춘 곳이겠지. 이 정도의 추측은 가능해진 상태가 되었다. 새롭게 읽는 책 《민간중국》에서도 ‘다양한 면모의 중국’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서두에 등장하는 ‘접면’이라는 말은 중첩되어 있는 중국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에 힌트가 될 수 있는 말이다. 지역과 사람 간의 관계, 그리고 그 사람과 국가의 관계가 달라짐에 따라 독자들이 마주하는 중국의 모습은 전혀 얼굴을 하고 있다. 다원화되고 다양하다는 특성을 굳이 일반화시키고 더 높은 차원에서 종합할 필요는 없다. 《민간중국》도 중국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묵묵하게 담기만 할 뿐, 어떤 학술적 담론이나 독자를 위한 교훈을 던지지 않는다. 이번 시간을 통해 미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중국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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