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에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뉴스를 조금만 훑어보면 인간들은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이다. 루쉰이 쓴 <광인일기> 속 광인의 말들이 구구절절 옳은 소리로 들리게 된다. 누군가는
이런 세계를 바라보며 ‘인류애 소멸’을 외친다. 이런 세계의 인간들을 사랑할 수 없고, 계속 살아갈 희망도 없다는
말이다. 애초부터 인류애가 한참 부족했던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 크게 공감이 되지 않는다. 언제는 인류애가 있어 삶을 살아왔던가. 이 세계에 고통이 없어야 인류를 사랑할 마음이 생기던가. 정의로운
세계가 나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가. 삶을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면 무엇이 나를 살게 했는가. 인류애처럼 증명하기 힘든 무엇보다는
가까운 이들로부터 얻는 위안이 아니었을까. 가까운 이들과 맺는 관계와,
그 안에서 구축되는 신뢰감과 연대감 비슷한 무엇이 내 삶의 원동력이었을까.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애정 어린 관계들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가정해보면 역으로 우리 삶은 그런 애정 어린 관계들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할
때 흔들리게 된다. 가까운 이에게 신뢰받지 못할 때, 가까운
이와 연대감을 느끼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지탱할 곳을 찾지 못하게 된다. 루쉰의 글 속에도 이런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가족이나 이웃들과 교감하지 못했던 <광인일기>의 광인과 <아Q정전> 속 아Q가 그러했고, 쿵이지도
마찬가지였다. 루쉰은 극단적인 고독에 휩싸여 삶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많이 썼다. 우리는 왜 그 인물들이 그런 고독에 처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들의 비참한 죽음을 상상하거나 지켜보아야 했다. 루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 중에는
그런 고독의 실마리를 알려줄 인물들이 등장한다. <연>이나
<애도>와 같은 작품 속 인물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연>에 등장하는 화자는 어릴 적 동생이 만들던 연을 빼앗아 부순 적이 있다.
연을 만들거나 날리는 일이 ‘못난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 일로 마음이 불편했던 화자는 동생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동생의 용서를 받아 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였다. 뜻밖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는 동생은 화자가 용서받을 기회 자체를 없애 버린다. 봄이 오면 화자는
슬픔과 고독 속에 갇힌다. 지금, 이 낯선 땅 하늘에도 고향의 봄이 찾아와 내게 사라진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져다주고 더불어 종잡을 수 없는 슬픔을 자아낸다. 나는 사나운 한겨울 속으로 숨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하지만 주위는 또 온통 분명한 한겨울이어서 내게 비상한 추위와 냉기를 준다.
<연> <애도>의 화자 역시 <연>의
화자처럼 용서받을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다. 쯔쥔이라는 여성과 살림을 차렸던 화자는 삶의 고단함과 궁핍의
탓을 모두 쯔쥔에게로 돌렸다. 비겁하게 쯔쥔이 집을 나가기를 은근히 종용하기도 하지만, 쯔쥔은 죽은 사람처럼 집에서 버틴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끌려간 쯔쥔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용서받을 기회를 잃어버린 화자는 쯔쥔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적는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고독 속에서 내딛는 걸음이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길보다 공허하다. 지금은 온통 초봄의 밤뿐이고, 게다가 저토록 길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첫걸음으로 그저
이렇게 나의 후회와 슬픔을 적는다. 쯔쥔을 위해, 나를 위해. 나는 그저 노래 부르듯이 곡을 하며 쯔쥔을 장송하고 망각 속에 묻는다. 나는 잊을 것이다. 나는 자신을 위해 망각으로 쯔쥔을 장송한 것마저 다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나는 진실을 깊이깊이 마음속
상처에 숨긴 채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망각과 거짓을 내 길의 길잡이로 삼을 것이다. <애도> <연>의 화자가 동생의 망각 앞에서 용서의 기회를 잃었다면, <애도>의 화자는 쯔쥔의 죽음으로 용서의 기회를 잃고 망각을 결심한다. 미처
수습할 수 없는 상처가 이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고독이라는 증상을 남긴다. 이들에게 고독은 살아가기
위해 해야만 하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관계 안에서 구축되어야 마땅할 신뢰감과 연대감을 저버린 이들은
자신이 그것을 부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각해야만 한다. 그 자각이 고독이라는 결과물로 남아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된다. 한편으로는 <연>과 <애도>라는
글에서 루쉰의 개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루쉰은 실제로 동생과 회복할 수 없는 깊은 갈등을 겪었고, <애도>에서처럼 쉬광핑과 살림을 차려 함께 살기도 했다. <애도>는 루쉰이 쉬광핑과 교류한 이후 아직 함께 살기
이전의 시기에 발표한 글이다. 그렇다면 이 글 속의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 루쉰 개인의 삶이 담긴 이야기로
보아야 할까. 이 글들 속에 루쉰이 느낀 고독의 배경이 담겨있다고 보아야 할까. 루쉰은 자신이 글 속에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음을
종종 말한다. 모든 글은 개인의 이야기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루쉰의
말처럼 문학은 망각이라는 문턱을 넘어 시작된다. <연>과
<애도> 역시 그런 망각을 통해 탄생했으며, 동시에 그 망각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 타인의 신뢰를
저버리고 연대감을 부숴버린 이들은 망각의 문턱을 넘어 다시 깨어나 고독에 이른다. 그 고독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자각한다. 나도 안다. 중국에서 나의 붓이 비교적 날카롭고 말도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역시 알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공리니 정의니 하는
미명으로, 성인군자란 간판으로, 점잖고 성실한 체하는 가면으로, 유언비어와 여론이란 무기로,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의 글로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칼도 없고 붓도 없는 약자들을 숨도 못 쉬게 하는지를. 내게 이 붓이 없었다면 수모를 받고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길조차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깨어났다. 그러기에 늘 이 붓을 들어 피부 속에 감추어진 마각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아직 ‘그만둘’ 수 없다> 죄인은 망각을 넘어 고독 속에서 깨어난다. 고독 속에서 자신을 자각하고 세계를 응시한다. 죄인은 죄인을 알아본다. 공리와 정의의 가면을 쓴 죄인들의 정체를 단숨에 간파한다. 자신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에 누군가의 무덤을 여러 개 만들면서 죄인은 살아간다. 인류를 사랑하겠다는 마음 따위
없이, 희망이라는 마취제도 없이 살아간다. 그야말로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 그냥 사는 정도가 아니라 희망 없이도 아주 잘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