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장 5. 푸코:
‘경계허물기’의 철학, 6. 들뢰즈와 가타리: 차이의 철학에서 노마디즘으로 푸코와 들뢰즈에 이르면 철학에 미치는 구조주의의 영향도
약해지고, 주체를 중요하게 사유하는 모더니즘 철학의 특성도 거의 사라진다. 푸코와 들뢰즈를 흔히 포스트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라고 흔히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푸코와 들뢰즈는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동시대를 살면서 여러 활동을 함께 했으므로 이들의 철학은 당연히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유사한 면도 있다. 반면에 극단적인 의견 대립이
있고 나서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았으므로 서로 스타일이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도 있다. 푸코와 들뢰즈 두 사람은 모두 근대의 철학자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에서 근대철학을 해체했다는 평가를 받는 맑스, 프로이트, 니체와의 관계를 그 중심에 놓을 수 있다. 이들의 철학을 새롭게 변용하거나 혹은 비판하는 지점에서 두 사람의 철학은 대체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주체나 지향점이었던 진리는 모두 해체된다. 그 해체의 지점에서 이들은 각자의 철학을 펼친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사유방식보다 방법론에 있다. 들뢰즈가 철학에서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많은 개념을 새로
만들어냈던 것과 달리 푸코는 개념을 만드는 일을 비판하면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청소년기에 광기와 성정체성의 문제로 고통스러웠던 푸코의
사유는 점차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과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성의 영역 안에서만 사유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푸코는 사실 광기라는 타자 역시 ‘동일자’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를 묻는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광인’이나 ‘정신병’이라는 말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냈는가로 바뀐다. 푸코가 보기에, 자신이
광인이 아니며 광인을 치료할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는 의사는 담론을 지배하는 권력관계 속에 광인을 끌어들인다. 동시에
광인의 목소리를 타자의 목소리로 만들어버린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나 《성의 역사》를 통해 제기하는 문제는 광기나 성이라는
영역이 허구일 수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점은 광기나 성이 허구인가 실재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광기나 성을 규정하며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나누는 경계로 이용하고 있는가이다. 그러니까 광기나 성의 어떤 영역이 ‘비정상’으로 규정되면서 ‘정상’도
따라서 규정되고, 이 둘을 나누는 경계도 만들어진다. 푸코의
말대로 ‘비정상’이라는 규정이 허구라면 ‘정상’도 허구이며, 둘을
나누는 경계도 존재할 수 없다. 푸코는 근대의 철학이 ‘비정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동일자에서 타자를 추방하는 과정을 추척하고 있다. 특히 푸코는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가
동일자의 입장에서 재구성된 역사임을 말하려 한다. ‘광기’나
‘성’이 역사적으로 변천해온 개념이라면 시대를 넘어서는 규칙이나
도덕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규칙이나 도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간파해야 한다. 푸코는 모든 관계에서 권력을
발견하며, 지식 역시 권력과 밀접한 관계라고 본다. 지식이
권력과 분리될 수 없다면, 철학은 권력이 야기하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해결하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위험에
처한다. 맑스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현실을 변화시키는 문제는 중요했고, 푸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푸코의 권력론에서 권력은 어느 일방에게만
소유되는 문제가 아니며,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상황도 불가능하다. 푸코에게 권력은 끊임없는 투쟁의 문제이고, 타자와의 관계인 동시에
자기와의 관계를 포함하는 문제였다. 권력에 대한 푸코의 탐구는 점차 윤리학의 성격을 띄기 시작한다. 물론 푸코에게는 윤리학 역시 역사적인 문제였다. 한편 차이의 철학을 주장하던 들뢰즈의 철학은 정신의학자인
가타리를 만나 노마디즘이 된다. 두 사람은 네 권의 책을 함께 쓰며 철학사의 중요한 스타일과 개념들을
잔뜩 생산한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문제는 미세한 차이를 포착하는 능력이다. 동일성이나 유비관계로만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면 세계는 다 똑같이 보이며, 변하지도
않는다. 만물의 차이나 변화를 이해하는 능력이 들뢰즈에게는 가장 중요한 철학적 능력이다. 초기의 들뢰즈에게 이 차이는 반복과 생성에서 비롯된다. 들뢰즈에게 욕망은 곧 생성이며, 욕망이 생산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외부의 차이를 이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차이를 만들어내며 변화하는 일도
중요하다. 들뢰즈에게 차이에 대한 긍정은 자신의 변화와 같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모든 일들이 들뢰즈에게는 ‘사건’이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계속하여 새로운 ‘배치’ 안에 있고자 해야 한다. 생명은 ‘기계’의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무엇과 결합하는지, 즉 어떤 배치에 놓이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들뢰즈에게는 욕망 역시 주체의 문제가 아니다. 욕망은 주체에 속하지 않고, ‘배치’에 영향을 받는다. 달리 말하면 욕망은 언제나 배치로 존재하며, 배치는 언제나 욕망의 배치이다. 욕망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특정한
양상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권력’으로 작용한다. 특정한 배치를 유지하려는 힘의 작용을 ‘영토화’라고 하며, 기존의 배치에서 변환되는 작용을 ‘탈영토화’라고 한다. 모든
욕망, 모든 배치는 ‘영토성’과 더불어 ‘탈영토화의 첨점’(새로운
배치의 가능성)을 갖는다. 들뢰즈가 말하는 탈영토화에는 혁명의
뉘앙스가 분명히 묻어 있다. 욕망이 혁명을 가능하게 힘이라는 말이다. ‘노마디즘’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안하는 새로운 철학적 스타일이다. 하나의 가치나
영토에 머물지 않는 탈영토화 속에서 사는 일을 말하며, 물리적 이동보다는 자기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에
가깝다. 단순히 낡은 가치를 파괴하고 부정하는 일보다는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고 새로운 스타일로 살아가기
위해 탈주해야 한다. 들뢰즈는 주체의 허구성을 인정하는 일을 넘어 주체가 그때그때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
잠정적인 결과물임을 확인한다. 우리의 삶은 배치에 따라 변화하며 여러 사건들 속에서 영토화와 탈영토화, 재영토화를 거듭하고 있다.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주체는 20세기 후반에 전혀 다른 주체로 변화한다. 이제 선험적이거나 고정된
주체는 없다. 진리 역시 주체의 물음과 관점에 따라 변화한다. 한편으로는
주체의 변화가 진리, 곧 지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도 된다.
푸코의 윤리학이 자기변형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들뢰즈 역시 ‘노마디즘’이라는 스타일의 문제를 중요하 여긴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에서 출발한 근대철학이 푸코와 들뢰즈를 통해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재소환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