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년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2020. 07.01 발제 손미경 6장 척계광 – 고독한 장군 척계광의 등장 명나라 16세기 중엽 무관의 처지는 문관에 비해 그 지위가 현저히 낮았다. 홍무 연간부터 이미 문관 중시, 무관 경시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문관집단이 성숙단계로 접어들어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사상 최고, 대신에 무관의 사회적 지위가 사상 최저로 되었다. 이러한 기형적 상태가 나타난 것은 명조가 정치 조직을 지나치게 단일화 하려고한 때문이다. 일원화의 사상적 기초는 공명의 가르침, 즉 유교로 이 제도가 정착되고 나서는 무장들의 목숨을 건 공헌도 사회적 영향 면에서는 문관의 한편의 훌륭한 문장에 비길 바가 못 되었다. 문관이 볼 때 무장의 이름이 드높게 되는 상황은 失政의 상징이 되는 것으로 문관이 갖는 고정관념, 즉 위로는 국가로부터 아래로는 개인에 이르기까지 무력을 믿고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위반하는 일이었다. 반대로 무장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판단력과 결단력이었고, 실효를 중시하였으며 극단적으로 도에 넘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문관이 볼 때 소인배나 하는 짓을 하는 무리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장군이 필부의 용맹 밖에 갖지 못한 인간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각급 무관을 지휘할 총독이나 순무에는 문관이 임명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실제로 무관 가운데 문맹자가 상당수였다. 총독이나 순무아래 또 ‘병마사’나 ‘해방도’라는 직책이 있어 실제 전략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군정 면에서도 인사, 보급, 교통 등 전반적인 사항을 문관이 도맡아 책임지고 있었다. 이러한 군사체제가 적국의 전면적인 침입에 대한 대비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님은 물론 적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문관들로서는 자신들의 임기동안 평온무사하기 만하면 족하고, 군사 개혁에 관한 계획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명조의 대외 상황은 열악한 군사제도가 문관들 자신의 안전도 위협할 것이라 느끼면서 개혁은 필연으로 되었다. 물론 개혁의 제1보는 뛰어난 장군을 뽑는 일이었다. 명장의 한계와 현실주의 시대가 명장을 필요로 하긴 했으나 현실은 딱 적군을 방어하는 정도에서 멈추어야 했다. 유대유든 척계광 이든 신군을 만들기에 필요한 제반 사항은 군비문제를 넘어 정치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명제국은 본질적으로 별만큼 많은 농촌들이 모인 하나의 집합체에 불과, 예의와 도덕이 법률을 대신하였고 위법 행위를 감추는 것이 유덕한 행위로 인정되는 낡은 사회였다. 즉 근대적인 기술과 낡은 사회조직은 결코 공존 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척계광은 현실주의를 택한다. 그는 국가 체제에는 손을 대지 않고 견실하게 직무 범위 내에서 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였다. 그는 혁신이 전통과 지나치게 괴리되지 않도록 하고 개혁을 소리 높여 부르짖지 않았다. 이상 만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장군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여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 장군으로 당시의 정치 현실을 인정한 위에서 기술적인 면에 국한된 군사개혁을 단행 하였는데 이것이 그에게 허용된 유일한 방안이었다. 척계광의 조력자들과 그의 비애 척계광의 성공은 16세기 중엽 명조에서 예외 중에 예외 그의 모든 일이 순조로웠던 것은 본인의 탁월한 재능 외에 담륜과 장거정과의 관계였다. 담륜은 문관으로 복건순무에까지 승진했으며 군사 분야가 그의 전문 분야였다. 척계광이 제출한 모병 및 훈련 계획은 담륜의 열렬한 찬사와 실제적인 지원을 얻게 되었다. 담륜은 척계광의 부대에 충분한 장비를 계속 공급하였다. 척계광의 복건 총병의 직임 또한 담륜의 추천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그의 협력 하에 척계광은 薊州의 군비를 혁신하였다. 담륜의 전면적인 지원이 있었지만 인습적인 관례가 귀찮은 문제를 끊임없이 일으켜 그를 괴롭혔다. 이때 다행스럽게도 담륜과 척계광의 계획은 장거정의 지지를 받게 된다. 장거정이 입각할 무렵 마침 그에게는 군비를 새로 정비하고자 하는 포부가 있었다. 계주는 그의 주의를 가장 많이 끈 군사 구역이었다. 장거정은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계주의 군비개혁은 척계광의 권력을 담보해야 가능한 것. 따라서 계주 관할 내의 척계광 이외의 상급 장관을 다른 군구로 전임시켜 척계광이 여하한 간섭도 받지 않게 하였다. 마침내 계주의 군대는 훈련개시와 더불어 재정 지원을 후하게 받았고, 그것으로 군마를 사들이고 화기와 전차를 제조했다. 물론 이런 파격적인 대우는 많은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장거정이 아무리 처신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했어도 제 3자 눈에는 친소관계가 분명하고 편파성도 심한 것으로 보여져 반대파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척계광과 같은 시대의 무인으로 그와 같은 공적을 수립한 자는 없었다. 그는 가능한 범위의 일은 훌륭히 완수했으며 무관이 누릴 수 있는 각종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장거정 일파 숙청 때 면직되어 생애 마지막 수 년 동안 쓸쓸하고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장거정과 운명을 같이 했기 때문에 예정된 수순일 뿐이었다. 척계광의 평가는 쉽지 않은데 그것은 당시 환경의 복잡성에서 그러하다. 일례로 청렴의 문제를 해서와 같은 선상에서 기대하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남는 문제는 척계광의 반란의ㅁ 의중 이다. 장거정이 척계광을 장기판의 어떤 말로 생각했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일단은 그런 혐의는 정치적인 희생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도 진상을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장거정이 위험한 척계광을 잘 제어했다고 언급한 점도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 관리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척계광은 현실주의자로 당시 상황을 적절하게 잘 헤쳐 나갔을 뿐이며 많은 군사서와 문집을 남기고 문인들과의 교류를 즐긴 점을 볼 때 무장 이지만 문관의 가치관을 지닌 뛰어난 무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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