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중국사: 청》 5.상업,
6.위기 이 책은 새로운 관점으로 청의 역사를 바라보려고 한다. 먼저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이 생물학적으로 확고한 정체성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관점이다. 여기에 청의 역사를 세계사와
긴밀하게 연결해 놓으면서, 유라시아 전체가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각자 나름대로 거쳐왔다는 입장이 중첩된다. 청의 상업 발달과 점진적인 쇠퇴과정, 아편전쟁을 연결해 서술하는
이 책의 5, 6장에서는 저자의 이런 입장이 특히 두드러진다. 흔히 농업국가로 오해하기 쉬운 청은 서양인들이 진입하기
전에도 이미 국내무역이 발달한 상업국가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명 말에서 청 초에 이르는 16세 중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제국은 ‘유통경제’ 혹은 ‘상품경제’가 지방 농촌사회 곳곳까지 침투하는 상업의 혁명을 겪었다. 18세기
말이 되면 농업 역시 자급자급 형태를 벗어나 곡물, 면화 등을 시장에서 판매되기 위해 생산하였다. 주요 곡물생산 지역이 판매를 위한 작물을 생산하기 시작하자, 다른
지역이 곡물생산을 시작하면서 중국의 국내교역은 계속 증가하였다. 17세기에는
점차 다양한 상품들이 제국 전역을 장거리로 이동했다. 상업의 발달은 이전의 신분제도나 사회체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했다. 청은 명대에 있던 개인의 이동 금지령을 폐지하고, 상업적 계약과 재산권을 보호했으며, 상품 유통을 막는 제약을 없애
시장의 능률을 높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입된 막대한 은은 조세제도의 변형을 가져왔고, 세금을 현금으로 걷기 시작하자 청 제국의 상업화는 더욱 촉진되었다. 17세기부터는
농업도 부재지주가 농장을 경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기 시작했고, 상품작물의 개량과 함께 농촌지역 노동자들이
부업으로 생산한 수공예제품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충분히 ‘자본주의
맹아’가 존재했고 도시 무산계급의 출현으로 볼 수 있을 만한 변화였다.
자본주의적 기업이 광산을 개발하고 동전의 수요도 늘었다. 재산권과 법적 효력이 있는 계약
제도가 만들어졌고, 주식과 기금 동원, 조합 설립, 전문 경영 부서가 생겨났다. 새로운 도시화 현상도 나타났는데, 기존에 있던 제국의 대도시들을 연결하는 작은 상업도시와 시진(번화한
읍내)들이 발달했다. 시진과 상업도시를 중심으로 확대된 중간계급이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경제력의 확대는 신분 상승의 열망 역시 증폭시켰고, 이는 곧바로 교육열로 나타났다. 청의 지역 간 무역은 분산적이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작은 규모의 영세상인들이 쉽게 상업에 종사할 수 있었지만, 이는
유통단계를 복잡하게 하여 지나치게 가격을 높이고 상품의 질을 관리하기 어렵게 했다. 이런 특징은 청이
세계경제에 진입했을 때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서양인들에게 경제가 종속되기 전에도 청은
이미 지역 간에 ‘내부 식민지’ 형태의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상인조합은 제국의 국내무역에서 ‘관계’를 활용한 우월적 조직으로 성장했다. 19세기에는 꽤 영향력 있는 조직이 된 상인조합은 각 지역에서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도시의 문화를 세련되고
개방된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상인조합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시장을 관리했으며, 이 자금으로 상하수도 시설을 유지하거나 복지·구호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일찍이 상업활동의 이익을 기반으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던 청은 무역과 시장의 유지에 많은 신경을 쏟았다. 중국 역대 제국들의 대외무역은 ‘조공무역’의 형태였다. 속국들이
종속관계를 인정하며 조공을 바치면, 중국 황실은 조공품보다 훨씬 가치가 큰 물품으로 답례를 했다. 가끔씩 왕이나 국가를 사칭하여 조공 답례품으로 무역 배당을 요구하는 서양 상인들이 있었으나, 정작 서양의 왕이나 사신은 ‘고두’를
거부했기 때문에 조공무역으로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조공무역은 서양 국가들에게, 중국이 세계질서를 존중하지 않고 무역의 이윤 추구를 폄하한다는 혐의를 씌울 빌미가 되었다. 초기에 중국에 진입한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으며, 유교문화가 기독교 신앙을 수용해 주리라 기대했다. 청의 황실에서도 기독교에 나쁜 인상을 갖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기독교
종파 갈등으로 예수회가 고립되고 중국 문화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면서, 강희제는 기독교의 선교활동을 금지하게
되었다. 18세기 초 선교금지령은 곧 건륭제의 무역제재 조치의 결과인 ‘광동 무역 체제’로 이어졌다. 광동 무역 체제는 제재인 동시에 서양 상인들의 무역에
대한 부분적인 승인이기도 했다. 광저우에서만 허락된 무역으로 인해 광저우는 외국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수십 년 후 영국은 광동 무역 체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국에 더 유리한 무역조건을 만들고 싶어했다. 조지3세는 편지에서 스스로를 ‘바다의
제왕’으로 칭하며 청 황제와 자신이 동등함을 강조했고, 사절은
고두를 거부했다. 고두는 그 자체로 서양의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낡은 중국의 아집과 권위를 상징하게 되었고, 서양국가들은 이에 대한 불쾌감과 자신들의 야심을 동시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19세기
청의 제도는 분명하게 쇠퇴하고 있었다. 서구의 산업혁명을 우연과 신대륙 착취의 결과로 보고 이들이 청에
끼친 충격을 감안하더라도, 청 왕조 내부에서 나타난 위기의 징후 역시 뚜렷했다. 산업정책들은 실패했고, 인재는 과잉 공급되었다. 하위학위 소지자는 늘었는데 세금을 줄이려고 관직은 늘리지 않아서, 70명의
학위 소지자 중 1명 꼴로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매관매직과
동시에 좌절한 입시생도 늘어갔다.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킨
홍수전 역시 그런 입시생 중 하나였다. 젊은 학자들이 소속된 한림원을 중심으로 사회비판이 강해졌고, 점차 무력시위도 나타났다. 건륭제 시절 득세했던 화신의 부정부패와 이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난 백련교도의 난은 청을 걷잡을 수 없는 침체상태로 몰아넣었다. 아편이 대량 수입되고 라틴아메리카
혁명 기간에 은 생산량이 감소된 일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경제의 위기는 곧 서구의 침입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혹독한 요구로 이어졌다. 포세신, 공자진, 위원, 도주, 하장령
등 청의 개혁을 제안하고 이끈 이들이 있었으나, 서구의 거센 압력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가장 큰 타격은 영국이 청과의 무역에서 입은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청에 수출한 아편이었다. 중국산 차는 영국에서 인기가 높았고, 동인도회사가 식민지 미국에 수출하는 주요품목이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
영국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나타날 때 문제가 되었던 품목도 중국산 차였다. (1773, 보스턴 차 사건) 무역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은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대량 반입했고, 이에
대한 중국의 반발은 다시 영국의 강경대응으로 이어졌다. 한편 유럽은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유럽의 국가들이 왕정을
강화하는 등 보수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빈 회의를 통해 유럽의 각국은 세력균형을 유지하기로 했고, 이 세력균형은 산업 후발주자나 약소국에는 무리한 요구를 강행하며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각 국가들의 형식적인 동등함 앞에서 세계의 통치자를 자처하는 청의 황실은 점점 더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이게 되었다. 아편전쟁과 난징조약으로 청의 외교적 자주성은 매우 손상되었고, 제국의 명예도 현저하게 실추되었다. 특히 이 책의 저자가 아편전쟁의
결과로 주목하는 현상은 중국 내부에서 나타난 한족들의 반민족정서이다. 영국의 침입 앞에서 청의 내부는
만주족과 비만주족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만주족에 대항하는 정서는 한족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었다. 만주족 수비 사령관이 영국군의 침입 앞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족
배신자’를 색출할 때, 한족들은 만주족에 대한 혐오을 형성하며
영국군에 대항할 마음을 품지 않았다. 놀라운 점은 청 제국 내내 새롭게 재구성되던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이 청이 몰락하던 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하나의
민족정체성으로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 정체성은 자부심이 아니라 혐오를 통해 완성되었다. 한족들은 청의 몰락을 중국 왕조의 몰락으로 보려 하지 않고 ‘만주족’의 실패로 이해하려 했다. 제국의 몰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만주족’은 실패의 원인이자 혐오의 대상인 하나의 민족으로 완성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민족정체성이 역사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은
흥미롭다. 만주족의 정체성만 재구성되는 게 아니다. 한족의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로 중국 내에서 만주족을 분리하면서 재구성된다. 아편전쟁 당시 유화노선을 선택했던
만주족 기선과 대비되는 임칙서 같은 인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칙서는 강경한 정책으로 영국인들의
아편을 몰수하여 바다에 버리는 등 아편전쟁의 직접원인이 된 사건을 조장한 인물이다. 전쟁을 불사하는 영국의 과격한 대응 앞에서 중국인들은
사건의 도화선인 임칙서를 애국자로 추켜세운다. 동시에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광저우로 보낸 ‘만주족’ 통치자들을 중국 제국 몰락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런 결론 앞에서 임칙서가 청 제국에 헌신한 관리였다는 사실은 어느새 소거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중국이라는 국가(제국)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고 제국의 몰락을 애도하기 위해 ‘만주족’을 국가에서 분리하고 혐오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