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연》 <불사르다>(위왓 럿위왓웡사), 비밀경찰(홍라이추), 구덩이 속에는 설련화가 피어 있다(라샴자) 세 편의 소설을 읽었다. 읽으면서 소설가 개인의 이력을 자꾸만 확인하게 되었다. 그만큼 소설가 개인의 정체성이 많이 녹아있는 소설들이었다. 첫 소설은 태국 남부 푸켓 출신 작가 위왓의 소설이다. 소설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태국 내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태국 남부는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며 인기를 끌었으나 부패 때문에 쿠데타로 실각한 전 총리 탁신 친나왓에 반감이 큰 지역이다. 2인칭으로 묘사되는 소설 속 인물들은 국왕모독죄가 존재하는 태국의 정치 상황에 반감을 품으며 홍콩의 우산혁명을 응원한다. 국왕에 대한 반감은 왕실 보존에 찬성하는 부모와의 관계에 균열을 내지만, 이 균열은 거센 저항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오랜 권위와 복종의 역사는 그들의 저항을 내적 혹은 소극적 저항으로 만들어버린다. 부모와의 관계 역시 단절보다는 애매한 거부나 냉소가 원망과 뒤섞인 형태로 나타난다. 부모에 대한 냉소와 원망에는 자신들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애정을 갈구하는 태도 역시 엿보인다. 구시대와 단절하기를 원하면서도 저항에 적극 참여할 수 없는 두 인물은 홍콩 시위에 참여하는 청년과 국왕의 사진을 불태우며 돌아다니는 소년을 응원한다. 이 응원은 부모에 대한 그들의 감정만큼 끈적하고 복잡하다. 네 인물은 서로 성애적 관계로 연결되는데, 이 관계는 말초적인 친밀감이나 도착적 유대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고통받는 자들의 가장 큰 고통은 자기 고통을 해소할 방법에 명쾌하게 접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고통을 오래 감내하며 익숙해질수록 적은 흐릿해진다. 아니, 애초에 적이 너무 많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사방에 깔린 적들을 해치우고 나면 자신에게 무엇이 남을지 두려워 적과 함께 천천히 자신을 죽여가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독하지 못한 이들은 언제나 자신에게만 잔인하다. 이쯤 되면 애초에 적이 아니었던 존재도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위왓의 소설이 정치적 상황과 빈곤을 버무렸다면, 홍라이추의 소설은 정치적 상황과 고독을 섞어서 이야기한다. 위왓의 소설에서 태국인들이 우산혁명에 지지를 보낸다면, 홍콩 작가 홍라이추는 차마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자신들의 민낯을 내보인다.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를 욕망했던 이들은 욕망 자체를 은폐하기 위해 비밀경찰을 활용한다. 비밀경찰은 억압자가 아니라 그들의 도구이다. 혁명과 팬데믹 속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은 ‘상상임신’이라는 병을 앓으며 고독을 겪는다. 이 고독은 끊임없이 자라는 고양이를 기르며 줄어들지만, 대형 동물을 집에서 기르는 일은 불법이다. 여성은 비밀경찰이 들이닥쳐 고양이를 빼앗아갈까 봐 걱정한다. 소설 후반부에 여성은 아이를 낳는 일이 두려워 남편을 비밀경찰에 고발했음을 고백한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확대하며 반복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그 여성의 비밀이다. 소설 속 본토에서 온 비밀경찰은 개인들 내면의 은밀한 욕망을 실현하거나 억압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모든 억압이 환상이나 과장은 아니지만, 누군가 억압을 이야기할 때는 자신이 ‘억압당했음’ 자체를 강조하기 위한 경우도 많다. 왜 ‘억압당했음’을 강조해야 하는가? 자신의 상처에 집중하게 만들면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들은 비밀경찰을 증오하면서 비밀경찰이 자신들을 체포하기를 바라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정체를 모르기를 바란다. 홍라이추의 소설이 정치적 상황을 내면과 연결한다면, 라샴자는 티베트족이라는 소수민족 정체성을 계급과 노동이라는 좀 더 보편적인 문제와 엮어서 이야기한다. 베이징에서 티베트어 서적 관련 일을 하던 주인공은 낮은 보수와 지루한 작업에 대한 불만을 대의명분으로 무마하려는 대표와 충돌하며 일을 그만둔다. 베이징을 떠나는 그가 가려는 곳은 이미 죽은 고향의 소꿉친구가 과거에 함께 도망치자고 했던 도시 라사이다. 권위적인 사회와 불합리한 구조 안에서 고통받으며 모종의 저항을 꿈꾸기도 하는 세 소설 속 인물들, 이들은 명백하게 저항하는 이들이라기보다 고통받는 이들이었다. 세 편의 소설을 읽으며 과연 고통받는 이들은 연대할 줄 아는가, 고민해보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곱씹으면서 과녁이 어딘지도 모른 채 자기 자신, 혹은 무언가를 어디에든 던진다. 이 무모한 행위는 고통을 줄여주지 않는다. 다만 생존하도록 만들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벗어나야 할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라샴자의 소설처럼 엉뚱한 곳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저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와 살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과 절연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 지나치게 산만하거나 혹은 단순한 세 소설의 서사는 이 서글픈 아시아인들의 고통을 예리하게 파고들지 못한다. 그들이 신음, 비명, 자기최면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