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산天山에 신이 있더래. 헌데 이 신의 모습이 매우 괴이해. 커다란 자루처럼 생겼는데, 마치 활활 타는 불처럼 붉은색이야. 다리는 여섯이고 날개는 넷인데 얼굴이 없어. 노래하고 춤추며 돌아다닌다고 해. 이 신의 이름이 바로 ‘제강帝江’이야.
<산해경>은 온갖 기이한 것들이 담긴 책이다. 산과 바다에 사는 기이한 동물들, 귀신들, 요괴들이 한데 모인 이 책은 오늘날에도 흥미진진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훗날 사람들은 여기에 그림을 붙였다. 요즘으로 치면 <괴수대백과>라고나 할까? 게 중에는 꿈에 나오면 흠칫 놀라 식은땀을 흘리게 할 만한 것도 있지만 피식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것도 있다. 제강帝江은 후자에 속할 법 한 존재다. 짤막한 다리며 앙증맞은 날개, 거기에 포실포실 살이 오른 모습은 귀여울 정도다.
헌데 잘 헤아려보면 제강이 마냥 귀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얼굴이 없다는 것. 그래서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다. 그것뿐인가. 어떻게 먹고 마시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 하여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면 이를 난감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으리라. 시뻘건 색깔에 부푼 주머니 같은 놈이 나타나 노래하고 춤추며 날아다니면 어떨까?
얼굴이 없는 신神, 제강. 참고로 여기서 신神이란 신령스러운 존재라기보다는 기이하고 신기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산해경>의 이 신기한 존재는 <장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장자>에도 얼굴이 없는 신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혼돈渾沌. 글자는 좀 다르지만, 오늘날 우리가 ‘혼돈混沌스럽다’할 때의 그 혼돈과 같다. 하긴 얼굴도 없는 저 신기한 존재를 보면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을 테다. ‘혼돈스럽다. 혼돈스러워…’
제강, 즉 혼돈이 살고 있다는 천산天山이라는 이름의 산은 그 기이함을 더해준다. ‘천산’이라는 이름만 생각하면 하늘에 닿은 높다란 산을 생각하기 쉽다. 허나 고대 중국인들은 높은 산을 영험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태산泰山이 대표적이다. 맞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로 시작하는 양사언의 시조에 나오는 그 태산이다. 양사언의 말처럼 태산은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고작 해발 1,500여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아 조금만 땀을 흘리면 가뿐히 오를 수 있다. 요즘에는 산 정상 부근까지 케이블카가 놓여 있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태산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태산에 오르면 대관절 이 산을 왜 신성시 여겼는지 의문이 들곤 한다. 만년설이 덮여 있는, 그래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그런 거대하고 까마득한 산도 아니다. 그런데도 산꼭대기 정상을 옥황봉이라 불렀다. 옥황상제가 머무는 천상세계. 그래서 정상 부근에 길게 늘어선 길을 천가天街, 하늘거리라 부르고, 그 거리로 들어가는 문을 남천문南天門이라 부른다. 하늘 문을 거쳐 상제, 하느님이 있는 신성한 곳으로 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진시황은 하느님을 만나러 이 산에 올랐다 전해진다.
흥미롭게도 천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도 실제로 있다. 헌데 이 산은 까마득히 먼 곳에 있다. 이른바 실크로드를 따라 한참을 가야 만날 수 있다. 파미르 고원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한참을 가야 이 산이 나온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7,000 미터가 넘어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아마 크기와 높이로만 치면 태산은 천산에 비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으뜸으로 치는 산에는 들지 못한다. 전통적으로 오악五嶽이라 하여 다섯 개의 산을 으뜸으로 꼽았는데, 천산은 그에 들지 못했다. 거꾸로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 하여 태산을 으뜸으로 친다. 천산에 사는 기이한 신, 제강은 이를 보며 어떻게 여겼을까? 혹시 서운하지는 않았을까? 하느님을 뵈러 태산에 오른다는 사람들을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헤아려보면 태산이 으뜸이 된 까닭은 단순하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가까웠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인들의 세계는 오늘날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았는데, 태산은 제법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산이었다. 까마득히 멀고 높은 천산은 고대 중국인들의 눈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테다. 더 중요한 것은 한눈에 들어오는 산이었기 때문이다. 눈에 담을 수 있는 산, 너무 멀고 아득하지 않은 산을 사랑했다. 하늘이 너무 멀어 가늠할 수 없어서는 안 되었다. 하느님은 적당히 멀고 높은 곳에 있어야 했다.
헤아릴 수 없음. 제강의 얼굴 없음은 바로 이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리라. 까마득히 멀고 아득히 높은 곳에 사는 신은 얼굴도 표정도 없다. 하나의 인격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혼돈스러운 덩어리. 그래서 ‘신神‘이라 부르기에 어색하지만, 거꾸로 신묘하다는 점에서는 저 태산 옥황봉의 하느님보다 낫다.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신묘하고 기이한 존재라 부르기에 부족하리라.
<장자>가 바로 그런 책이다. 신기하고 기이한 책.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워… 어지럽다 어지러워…’하는 한탄을 내뱉게 만드는 책. 눈도 입도 코도 없이 맨얼굴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기묘한 덩어리처럼. 그러나 다시 거꾸로 제강 이야기로 돌아오면, 이 놈의 정체를, 이 놈의 속내를 알아보겠다는 생각이 없다면 나름 귀엽고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책이다.
장자는 일찍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말하는 자는 제대로 알지 못하며, 제대로 알면 말로 옮기지 못한다.’ 그 말에 따르면 <장자>에 대해 쓰는 이 글은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지고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또 어떤가. 저 덩어리 같은 밋밋한 놈을 발가벗겨 보겠다는 생각이 없다면, 나름 헤아려보고 말해보겠다면 또 영 부질없는 짓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정체를 똑똑히 까발리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양사언은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 말했지만, 장자라면 좀 다르게 말했을 것이다. 오르고 올라도 못 오르는 산도 있으며, 설령 꼭대기에 올라도 산을 채 다 알 수는 없을 거라고. 그렇다고 넋 놓고 지켜만 본다고 능사는 아니며, 구경꾼만 되어서도 안될 것이라고. 문득, 부아가 치밀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러니 ‘혼란하다 혼란해!’라는 말을 집어삼키며 한 걸음 크게 내딛자. 장자의 혼돈을 만나러 출발!
---------- * 세미나 내용을 공유합니다. https://youtu.be/dGaL6n26q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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