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읽을 때 잊어야 할 것 ‘제물’론인가, 제’물론’인가
지금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장자>라는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결과 장자와 <장자>의 거리는 생각보다 꽤 멀다. 어쩌면 그 사이의 간극은 끝내 좁힐 수 없을지 모른다. 텍스트, <장자>를 아무리 헤집고 분석한다 하더라도 역사적 인물, 장자의 생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거라는 말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장자>에 지나치게 주목하지도 말아야겠지만, 거꾸로 장자 본인의 목소리를 찾겠다는 어리석은 시도로부터도 좀 떨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요유>에서 말한 ‘유遊’가 얼마간의 떨어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조금은 떨어져서 <장자>를 읽을 필요가 있다. 너무 진지하게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조금 비스듬히 <장자>를 읽어보자는 이야기이다. 습관적이고 손쉬운 읽기 방식에서 벗어나 <장자>를 대해보자는 말씀. 너무 진지하지 않게.
내가 보기에 <장자>를 읽는 태반의 사람이 각 편의 이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세 글자로 이루어진 내편의 각 편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장자> 전체에서도 내편의 이름은 가장 후대에 붙여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외/잡편의 편 이름은 대체로 두 글자인데, 각 편을 시작하는 글자를 떼어 제목으로 삼았다. 따라서 각 편의 이름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이런 전통은 <장자> 이외에 <논어>, <맹자> 등에서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옛 사람들은 편의 이름에 별 공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편은 그렇지 않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따로 지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소요유>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소요유逍遙遊’라는 글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彷徨乎無為其側,逍遙乎寢臥其下’라는 표현, 그리고 ‘若夫乘天地之正,而御六氣之辯,以遊無窮者,彼且惡乎待哉!’, ‘乘雲氣,御飛龍,而遊乎四海之外。’에서 볼 수 있듯 ‘소요’와 ‘유’는 각각 따로 표기되었으며 이를 합쳐 ‘소요유’라는 제목을 만들었다.
‘소요’는 나무 아래에서 누워 쉰다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유遊’의 활동성을 생각하면 '소요'보다는 도리어 ‘방황’과 ‘유'를 결합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들에 심긴 나무 곁에서 방황彷徨하듯, 끝없는 곳을 떠돌며(遊無窮) 천하 바깥을 노닐 수(遊乎四海之外) 있는 게 아닐까. 따라서 <소요유>라는 제목 대신 <방항유彷徨遊>라는 제목이 되어도 좋았을 것이다. 아마 그렇게 되었다면 <장자>를 읽는 방식이 크게 바뀌었겠지. <소요유>라는 제목을 붙인 인물은 장자를 누워있는 인물로 소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제물론>에서 ‘호접지몽’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
<제물론>의 경우에는 보다 복잡하다. 왜냐하면 <제물론> 전체에서 이 글자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더 많은 해석이, 편집자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物과 論이 각각 등장하기는 하나 이 둘을 함께 엮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齊는 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재물론>이라는 이름은 장자가 아닌 누군가 독창적으로 만든 표현이다. 오강남은 다음과 같이 ‘제물론’의 뜻을 풀이하고 있다.
“이 편은 <제물론>이라는 제목부터 해석이 분분하다. 齊는 ‘고르게 하다’, 物은 ‘사물’, 論은 ‘이론’. 이 세 개념을 어떻게 연결시키는 가에 따라서, 1)’齊物에 대한 論’ 즉 ‘사물을 고르게 하는 데 대한 이론’으로 풀거나, 2)’物論이 齊함’으로 푸는데, 여기서 다시 ‘物論’이 ‘物과 論’이냐 혹은 ‘物에 대한 論’이냐에 따라서, a) ‘사물고 이론들을 고르게 함’으로 풀 수도 있고, b) ‘사물에 대한 여러 이론들을 고르게 함’이라고 새길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해석이 더 가능하지만, 당唐 이전에는 주로 2-b의 해석이 지배적이었으나 송宋 이후에는 세 가지 모두 인정해 왔다.(60쪽)”
과연 ‘제물’론인가 아니면 제’물론’인가.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면, <장자> 내편 각각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제물’론으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보면 ‘사물을 고르게 하는 논의’라는 뜻이 되고, 실제로 이런 의미로 오래도록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제물’론인가 제’물론’인가 하는 식의 질문은 <장자>를 읽는데 하등 중요하지 않는 문제라는 생각이다. 제목을 지우고,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장자>를 읽는 것이 낫다. 어쨌든 <제물론>이라는 제목은 장자로부터, <제물론>의 여러 글로부터도 꽤 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물론>이라는 제목으로부터 출발하면 내편에 제목을 붙인 누군가의 해석에 묶여 <장자>를 읽게 된다.
각 편의 이름은 그저 누군가 임의로 붙여놓은 고유명사에 불과하다. 이를 지우고 각 편을 읽어 볼 것을 제안한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이 편에 ‘제물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적절한 것이었을까. '제물론'이라는 이름은 이 편의 주요 내용을 잘 담아내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제목을 붙인다면 어떨까? 누군가는 조삼모사를 강조할테고, 누군가는 호접지몽을 또 누군가는 다른 우화를 강조할 테다.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 여러 우화를 묶어 <제물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그의 해석대로 그 편을 읽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 편을 꿰뚫는 핵심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제물론>에 속하는 글들이 먼저 있었는지, 아니면 누군가 임의로 장자의 글을 솎아낸 뒤에 ‘제물론’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체로 정황상 후자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물론’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그 편집자의 노고를 무시하고 읽자는 이유는 그의 시도가 얼마간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물론> 안의 여러 글을 서로 짜임새 있게 엮지 못했다. 내용은 산만하며 어지럽다. 편집자의 의도와 달리 새어나가 버리는, 혹은 쓸데없이 덧붙여진 글들이 너무 많다.
결국 내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우리에게 익숙한 논의, 특히 <제물론>에서 그것도 ‘제물론’이라는 이름에서 출발한 ‘사물을 고르게 한다’는 식의 주장은 장자의 것이, 혹은 <장자>의 주요한 주제가 맞는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사물을 고르게 한다’는 주장으로 <제물론>을 읽는 것은 더 다양한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잘못된 출발점은 아닐까?
사실 이것은 <장자>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과도 관련이 있다. <장자>는 산만하고 어지러운 책이다. 특정한 의미를 확정하기 힘든 책이다. 따라서 제목에서 출발하는 <장자> 읽기는 <장자> 텍스트의 특징을 지우고, 나아가 <장자>를 특정한 의미에 가두는 읽기 방식일 수도 있다. <장자>의 특징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장자는 물론 <장자>와도 먼, 오독의 방식이기도 하다.
https://youtu.be/P4RnTCufs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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