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줄게.“ 원숭이 치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한 말이다. 원숭이들은 화낸다. 배고프니까. 지금 당장 조금 더 많이 먹고 싶을 것이다. 다시 원숭이 치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말한다.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줄게.”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한다. 지금 당장 조금 더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저녁이 되었다. 원숭이 치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말한다. “자, 약속대로 저녁이니까 셋을 줄게.” 원숭이들이 모두 ○◌한다. ○◌? 원숭이들은 아침에 한 선택에 대해 후회한다, 자신을 비웃는다, 만족한다, 내일의 선택에 대해 고민한다, 더 화낸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고 해서 저녁에 배가 덜 고프지도 않으니까 성이 날 수 있음), 그냥 잘 먹는다, 잊지 않고 주니 감사하다 등등. 조삼모사 이야기는 결국엔 하나인데 성내다가 기뻐하다가 반복하는 감정의 상태를 보게 한다.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 문단은 '두 길을 걸음(兩行)'으로 끝을 맺는다. '두 길을 걸음'이라니. 분신술을 쓸 줄 알면 가능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두 길을 동시에 걷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마치 동시에 두 길을 다 가보는 사람의 모습이 가능할 것 같아 설렌다. 물론 한길을 가면서 아침저녁으로 널뛰듯이 바뀌는 내 기분을 고려하면 두 길을 갈 생각만으로도 멀미가 나지만 말이다. 난 한 우물(연극)만 파고 한 길(배우)만 무던히 가는 것이 미덕인 줄 알고 옆길(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하는 것들-?) 보이면 괜히 죄짓는 기분이 들어 스스로 검열하듯 살았다. 갑자기 이런 과장된 고백이 당황스럽다. 그래도 조금 더 가본다. 한 길 만 가다 보니 놓쳤다고 여겨지는 것들, 그러니까 안 가본 길에 대한 미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침 산자락에 낀 안개처럼 어렴풋이 운치가 있는 '안 가본 길'에 대한 상상적 풍경은 신선하다. 그래서 외길 인생, 장인 인생을 메마른 훈장처럼 간직해온 내가 갑자기 딱하다. 내가 원숭이라면 난 ○◌에 '그냥 잘 먹는다'를 쓰고 싶지만 '참 딱하다'라고도 쓰고 싶다. 자아 위로는 이쯤에서 그만하고 조금 방향을 틀어서 가본다. 불교 수행의 방법으로 팔정도가 있다. 그중에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를 가장 처음에 두는데 바르게 보기의 뜻을 풀어보면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두루 보는 일이다. 두루 보려면 붙어있는 것 보다 떨어져 있는 것,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이 유행하는 요즘, 무작정 하던 일들과의 거리 두기까지 가능해져서 그런 걸까. 내 안의 감정들, 내 안의 생각 습관들과의 거리 두기도 얼핏 되는 것 같다. 거리 두기가 일거리를 멈추게 했지만, 그 자리에서 내가 갈 길에 대한 상상적 풍경을 신선하게 그려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두 길을 걸어보는 걸까?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저녁이 되었다. 원숭이 치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말한다. “자, 약속대로 저녁이니까 셋을 줄게.” 원숭이들이 생각했다. "저 원숭이 치는 사람을 바꿀까?" 총선이 며칠 안 남았다. 총선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살짝 비켜나가도 될 만큼 특별한 일인지, 어떤 시선으로 누굴 뽑아야 할지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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