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아나키즘] <국가처럼 보기> 발제: 국가의 가독성은 어떻게 국민을 창조하는가2020-04-1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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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처럼 보기 1부 가독성과 단순화의 국가 프로젝트

 

카프카의 소설 》은 외부인이 한 시골마을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먼 길을 와 늦은 밤에 도착한 외부인을 마을 사람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외부인은 자신이 측량사라고 밝히며, 성 안에 들어가겠다는 요구를 반복한다. 마을 사람들은 외부인이 성에 들어가는 일에 좀처럼 협조하지 않으며, 소설이 미완으로 끝날 때까지 외부인은 성에 닿지 못한다. 과거에 국가가 파견한 행정관들은 이 소설의 외부인처럼 복잡한 지역사정을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제임스 스콧은 그 외부인(행정관)의 행적을 따라 국가가 어떻게 모든 국민과 만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영국과 프랑스 등 근대적 정치체계를 갖춘 유럽의 국가들은 이전의 사회들보다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가독성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자연과 인간이 포함된다. 가독성의 목표는 국가 재정의 확충이었다. 국가는 간접통치를 하며 공물을 받는 형태보다 직접통치를 하며 조세를 거두는 형태를 원했다. 조세를 가능한 많이 걷는 동시에 탄력적으로 운영하여 저항을 최소화하려면 정보가 더 많이 필요했다. 많은 국가들이 조세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지 못해 전쟁에서 패하거나, 국가 자체가 사라지거나, 인구의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가독성은 많은 부분에서 단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근대국가 이전에도 국가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단순화하는 방식을 사용해왔다. 그 시도들은 지역의 지배관계를 해체하여 국가의 영향력을 증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지역의 지배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봉건세력들은 이런 국가의 틈입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습속을 지키려 했다. 국가와 새로운 관계 맺기를 거부하던 이들 역시 이 저항에 함께 했다. 그 결과 근대 이전 국가의 단순화 프로젝트는 대체로 성공하지 못했다.

 

국가의 단순화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시기는 근대 이후이다. 영국과 프랑스에 등장한 근대 국가는 계몽주의와 보편적 시민권을 이념으로 내세웠다. 자유주의 시장 경제가 이를 뒷받침했고, 부르주아계급이 새로운 국가를 이끌었다. 절대왕권의 요구에도 완강히 저항했던 귀족과 성직자 등 봉건 특권계급은 혁명을 통해 몰락했다. 대규모 상업 교환과 장거리 무역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지역마다 달랐던 도량형의 통일을 촉진했다. 경제적 측정의 단순화는 정치와 혁명의 단순화로 이어져 동질적이고 균일한 시민권의 개념이 정착되도록 했다.

 

단순화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외부인이 어떤 지역에 침투하여 빠르게 파악하려면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방해가 된다. 사용하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가능한 단순하게 정보를 집약하고 불필요한 정보들을 빼고 나면 낯선 지역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정보는 특정한 목적에만 부합할 뿐 그 지역의 많은 부분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숲을 단순화하여 가독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숲의 생태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이 점에서 가독성을 위한 단순화는 굉장히 위험한 무지를 초래할 수 있다.

 

국가의 단순화는 행정관의 무지를 초래하는 동시에 현실과 국가가 수집한 정보 사이에 괴리를 발생시킨다. 행정관은 정책을 수립하고 적용하기 위해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활용하지만, 그 정책은 현실의 국민과 동떨어져 있을 때가 많다. 지나친 단순화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정보를 만들어낸 셈이다. 문제는 이런 정보가 단순히 정보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정보는 정책을 통해 실제 적용되어 자연이나 인간의 삶을 변형시킨다. 행정관이 자신이 수집한 정보대로 현실을 단순하게 가공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19세기의 도시는 이런 국가 단순화 프로젝트에 많이 이용되었다. 나폴레옹 3세와 파리시장 오스망의 파리 재건 계획이 대표적이다. 도시는 통치하기 쉬운 형태로 재편되고, 국민의 저항지점을 무력화하거나, 특정세력을 추방하는 방향으로 변형되었다. 벤야민은 이 파리 재건 계획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며 <19세기의 수도, 파리>라는 제목을 붙인다. 19세기의 파리는 단지 프랑스의 수도가 아닌 전세계의 도시모델이었으며, 파리는 19세기 전체를 대표하는 도시였다. 식민지에서 이 도시 계획들은 더 강력한 형태로 활용되었다.

 

자연과 공간을 활용하고자 하는 국가의 의도는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민들은 영구적인 부계 성을 부여 받았고, 표준언어와 문자, 표준척도의 사용을 강제 당했다. 이로 인해 조세와 병역을 위한 인구조사가 원활해졌고, 국가의 표준화된 양식에 길들여졌다. 이제 대다수의 인간은 규칙적으로 늘어선 군대의 막사와 같은 주거지에서 일련의 식별번호를 부여 받은 채로 갈아가면서도 크게 저항하지 않는다. 국가의 단순화는 국가의 논리에 순응하는 사람에게는 보상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처벌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가독성은 이런 방식으로 국민을 창조한다.

 

카프카의 소설 》의 주인공이 지금 우리의 도시에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국가가 파견한 외부인 측량사는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의 협조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조차 국가의 행정관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자부하기 힘들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며, 그런 일은 높은 곳에서나 가능하다. 높은 언덕이나 하늘에서 내려다볼 때처럼 말이다. 상부에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며 조직하는 국가(행정관)의 시선은 이제 신의 시선과 유사해진다. 지적도와 토지대장에 기록된 정보로 무장한 측량사는 지역에 침투하여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수집한 정보를 통해 국가가 가독성을 높였다면, 국민들은 반대로 자신이 사는 지역, 자신의 삶에 대한 독해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가 요구하는 양식대로 서류를 준비하려고 관공서를 방문하는 순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규정들과 암호 같은 문자들이 나열된 문서와 마주하게 된다. 공문서가 없다면 나는 자신의 신분조차 증명할 수 없다. 이제 외부인은 측량사가 아닌 우리다. 관공서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서류를 작성할 수 없고, 관료들의 문 앞에서 수없이 만남과 요구를 거절당하는 국민들. 우리가 바로 외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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