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중국] 늘어나고 섞이고 드나들고2020-01-08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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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고 섞이고 드나들고

에레혼

 

 

1주변을 새롭게 경계 짓기 _ ‘중국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영어 명칭 China는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일까? 여기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진나라의 중국어 발음 'Qín[chin]'으로부터 China가 유래했다는 설도 그 중 하나이다. (중국의 고도 장안長安의 옛 중국어 발음이 [chángnǎn]이고, 이 발음이 변해 China가 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중국 밖의 사람들이 보았을 때, 진나라는 고대 중국 왕조를 대표한다. 병마용, 만리장성 등 진나라의 유물이 곧 고대 중국의 표상처럼 인식되는 일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진나라는 중국인들의 의식특히 영토와 변경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거자오광은 진나라의 등장을 중국주변사이의 경계가 공고하게 된 계기로 보고 있다.

 

 

공고해졌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진나라 이전 시기에도 중심과 외부를 구분하려는 시도가 존재했으나(p.22) 진나라가 중국사에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중국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출현은 곧 새로운 체제인 군현제의 등장과 동일한 의미이며, “이와 같은 새로운 국가의 제도 가운데서만 비로소 소위 중국이 기본적으로 형성되고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p.23)

 

 

'China'로 번역된 중국이 진나라와 관련된다면, 이번에 중국 내부로 시선을 돌려보자. 중국인들에게 자국을 대표하는 왕조를 중국사에서 고르라 한다면 이들은 어느 시기를 지목할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한나라를 꼽을 것이다. 중국 인구 대다수(90%)를 차지하는 민족을 부르는 호칭은 한족漢族이지 진족秦族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폭정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 이란 명칭이 다수 민족을 대표하는 호칭으로 선택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도, 청나라를 몰아내자는 구호가 나올 때도 '漢'이라는 글자는 반복적으로 소환되었다.

 

 

<전통시기 중국의 안과 밖>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 왕조가 통일(unity)의 토대를 닦았다면 한 왕조는 이를 바탕으로 통합(integration)을 이뤄낸 셈이다. ‘중국이 국가의 명칭이 된 것은 중국사 전반을 놓고 볼 때 짧은 시기에 불과하지만 현재 중국의 영역에 대한, 그리고 중국 민족 표준형에 대한 공감대는 진한 왕조 성립시기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나라에 대한 중국인의 각별한 애착순수한 한족 문화를 계승한 왕조가 중국 역사에서 드물었던 것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실제로 한나라 이후 한족이 세운 통일 제국으로 특정 지을 수 있는 국가는 송나라와 명나라 두 국가에 불과하다. 거자오광이 지적한 바와 같이 송대와 명대의 기본적인 공간만이 정치, 제도 및 문화가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중국’(한족 중국’)이었다.”(p. 35) 나머지 통일 왕조들와 당, 그리고 원과 청은 상대적으로 더욱 국제적인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다.

 

 

예컨대 수당은 선비족鮮卑族과 한족이 융화된 집단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진입하여 세운 국가들이다. 두 왕조의 영토 확장과 외래문화에 대한 포용은 중국 문화의 다양성이 자리잡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7세기 이후 당 왕조의 건립으로 강역이 계속 밖으로 확장되었고, 페르시아, 돌궐, 소그드, 토번, 천축 등 각 민족이 분분히 중국의 핵심지역에 들어오게 되었다.” (p.33) 원나라와 청나라의 경우 아예 한족과 관련되지 않은 이민족이 세운 국가로, 두 시기를 거치면서 이전에 중국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국가들이 변경의 내부로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p.36)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특히 청 왕조는 동쪽으로는 지금의 러시아 동부까지, 남쪽으로는 현재 중국 하이난성海南省까지, 그리고 서쪽까지는 신장新疆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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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상단의 '무천진武川鎭'에서 선비족과 한족이 힘을 합친 집단이 등장했다. /

지도 하단에서는 회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2장 중국이 되다 _ 순혈과 잡거雜居의 교차

 

 

어느 나라든 북방에 있는 민족은 남쪽으로 이동하려 한다. 이는 열악한 북방 기후나 토양을 기피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족의 남하는 중국에서 한화漢化라는 키워드와 만나 독특한 현상이 된다. 다시 말해 중국사에서 이민족들은 중국에 자리를 잡은 이후에 자신들의 문화를 버리고 한족으로 변모하고자 했다. 이렇게 한화된 집단은 다시금 외부에 있는 민족들을 이민족으로 규정해왔다. <전통시기 중국의 안과 밖>에서는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시대(‘위진 이후 천년’)는 북방의 이민족들도 부단히 남하하던 시대라는 점이다. 심지어 중국사의 추세 자체가 이민족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 한족과 융합하던 시대였으니 한족 자체도 점차 북방민족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pp.50~51)

 

 

춘추전국시대 이후 진한이 등장한 것과 위진남북조 시기 이후 수당이 등장한 것을 단순히 분열 이후 통합’이라는 공통 현상으로 분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이 중국시스템을 수립한 국가였다면, 당은 외부에서 중국으로 이입되었음에도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기보다 이전의 한나라(혹은 한족 문화) 체제에 기반한 제국이 되길 바랐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한화에 선비족 문화가 끼어들 공간은 없었다. 청나라가 중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고 나서 만주족의 전통을 버렸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의 한화였다.

 

 

2장에서도 1장과 마찬가지로 한화한 이민족의 중국과 다른 맥락에서 해석해야 하는 왕조로 송나라와 명나라를 묶어 분류하고 있다. 송의 멸망(1279)과 명의 건국(1368)에는 백년에 가까운 시간차가 존재하며, 두 국가의 통치 방식이나 주요 사상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명시대가 비슷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유는 두 왕조가 모두 한족 중국이기 때문이며, 해당 시기에 중국의식이 심화되기 때문이다.

 

 

송대에 한당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한 열망,이런 열망은 송의 원래 영토를 상당부분 빼앗긴 남송시기에 강화되었을 것이다그리고 명대에 진 왕조의 만리장성을 이어서 축성하며 외부와의 경계를 설정하려 했던 노력은 모두 해당 시기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중국관념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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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남송은 북송시기 수도인 변경마저 금에게 함락당한 국가였다. /
우: 사진 왼쪽의 가욕관과 사진 오른쪽의 산해관은 명대에 축성된 것이다.)

 

 

 

책의 56페이지와 57페이지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명나라 역시 만력연간(1572~1620)중국으로의 이민(한화)과 영토 확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이러한 정책 시행의 결과 명 왕조가 단지 점거만 하던 지역마저도 중국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문제는 정치적, 제도적, 문화적으로 대체로 동질적인 명 제국의 형성이 왕조의 국운이 쇠한 시기에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등장한 청은 대규모 영토 확장을 시행하면서 이전과 판이하게 다른 중국패러다임을 형성하게 된다. 청나라는 이전에 중국이라 인식되지 않았던 신장, 시장西藏, 몽골 같은 지역들도 자국의 영토로 복속시켰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과정에서 공산당이 회족장족묘족 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진입한 것이 소수민족들을 봉건전통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인가, 아니면 다시 이들의 거주지를 침략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청 제국의 영토 확장과 무관하지 않은 문제이다.

 

 

귤이 탱자로 변할 수는 있어도

 

 

귤이 탱자가 된다(귤화위지橘化爲枳)’는 고사성어가 있다. 남방에서는 귤이었던 것이 회수(혹은 회하淮河)를 건너 올라가면 탱자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환경에 따라 동일한 것도 전혀 다른 성질이 될 수 있다는 간단한 이치를 설명하고 있지만 회수를 기준으로 한 중국 남방과 북방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 관습적으로 인용되기도 한다. 핵심은 강 하나 차이로 귤 종자에서 다른 과일이 난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갑자기 <안자춘추晏子春秋>에 등장하는 오랜 우화가 떠오른 까닭은 중국의 밖에서 안으로 넘나들었던 이민족들의 모습이 마치 귤이 탱자로 변하는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제로 적용해서 성어를 만들면 이화위한夷化爲漢(이민족이 한족이 되다)’ 정도 되는 아무말(?)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흥미로운 것은 중국으로 들어오며 한족이 되고자 했던 이들은 있으나 다시 이민족의 문화를 찾고자 한 이들은 드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번 양보해서 한족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남방을 한화시키는(p.51) 현상은 중국 역사에서 그 사례를 발견할 수 있으나 바깥과 내부의 전복이 일어난 경우는 살펴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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