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기 중국의 안과 밖: ‘중국’과 ‘주변’ 개념의 재인식》
제5장 ‘한화’, ‘식민’, ‘제국’에 대한 재인식, 결론 ‘중국’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중국’의 특징을 한족의 문화로 이해하려는 견해들이 있다. 거자오광은 이런 견해들에 흥미를 느끼면서, 한족 중국 특유의 문화가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한족 문화를 중심으로 중국을 설명하려 할 때는 ‘한화’, ‘식민’, ‘제국’이라는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거자오광은 ‘한화’, ‘식민’, ‘제국’이라는 문제를 서구의 개념을 빌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동시에 서구 학자들의 견해만으로 중국의 ‘한화’, ‘식민’, ‘제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서구 학자들은 ‘한화’ 자체에 반감을 가진다. 이블린 로스키는 ‘한화’에 대한 중국 학자 허빙디의 주장을 ‘한족 민족주의자의 역사 해석’이라고 비판하며, 중국을 통치한 적 있는 소수민족들의 공헌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서 부각되는 점은 청조의 독특한 통치방식과 이전 왕조들에 비해 확장된 영토이다. 거자오광은 이 논쟁에서 정치사나 제도사의 문제만 강조되고, 문화사나 사회사의 문제는 축소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한화’ 논쟁 안에서 양측의 주장에 대한 거자오광의 견해가 무엇이냐 물으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가 되겠다.
청은 분치를 통해 문화적 혼종성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한화’ 역시 문화적 현상으로 청의 제국 안에 존재했다. ‘한화’는 일종의 전략이었으며, 이후에는 관습이 되었다. 그렇다고 ‘한화’가 자발적으로 평화롭게 이루어졌다는 주장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다. 거자오광이 ‘한화’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전제가 필요하다. 서구 학자들이 오해하듯이 ‘한화’를 어느 민족 문명의 ‘승리’로만 간주하지 않으며, 사회사·문화사적으로 이미 발생한 적이 있는 현상으로만 간주한다는 전제이다. ‘한화’가 현대까지 이어지는 한족의 문화적 우월주의로 발전할 여지를 미리 차단한다.
풍속의 변화는 문화사의 과정일 뿐 아니라 살육과 전쟁으로 이루어진 정복사의 과정이기도 했다. 확장된 영토로 인해 민족과 문화가 더욱 다원화된 청조에도 ‘한화’는 지속되었다. 왕조가 변해도 예법을 가르치려는 사대부 관료들의 문화는 변화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족의 문화는 이미 이민족을 교화 혹은 계몽시키는 문명의 표준이 되어있었다. 교화가 늘 평화롭게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교화되고 문명화된 이민족은 실상 한족과 구분되지 않았다.
‘중국’ 제국은 존재했다
서구 학자들이 ‘한화’에 반감을 가진다면, 근대 제국주의의 피해자인 중국의 학자들은 ‘식민’ 혹은 ‘제국’이라는 평가에 반감을 가진다. 최근 서구 역사학자들은 청조의 영토 확장이 세계사적 관점에서 서구의 식민주의와 비슷하다고 이해한다. 거자오광은 이들의 견해가 중국 입장으로 범주화한 ‘중심-변강’ 관념에서 벗어나있음에 주목한다. 중국 학자들은 ‘중심-변강’ 개념과 ‘한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서구 학자들의 주장대로 역대 중국 왕조들의 정복과 ‘문명화’ 과정이 ‘식민지배’와 유사해 보이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거자오광은 청 제국의 세력 확장이 ‘식민주의’였음을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이는 분명 ‘식민’이지만, 서구에서 들어온 ‘식민’ 개념을 여기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는 반대한다. 청조가 본토를 벗어난 해외원정을 하지 않았고,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정복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청조는 종주국과 식민지의 이질성을 보존하지 않고, 제도와 문화를 통해 피정복민을 동질화시켰다. 거자오광은 이런 점에서 청조의 ‘식민주의’를 서구의 ‘식민주의’와는 다르게 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식민주의’를 부분 인정하고 나니 ‘제국’을 인정하는 일도 쉬워진다. 서구 역사학자 제임스 브라이스는 중세의 제국을 묘사하면서 ‘제국’의 3요소를 다음과 같이 꼽는다. ① 군주국의 존재, ② 신성국가의 범위와 신성교회의 범위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 ③ 세계성. 거자오광은 이 요소들을 중국에 적용하여 황제의 존재와 신성한 후광, 외부로 팽창하려는 추세로 볼 때, 중국의 왕조들 역시 ‘제국’이라 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특히 ‘세계성’의 측면에서 청은 더욱 그랬다. 청의 강역 안에서는 제국의 다원성과 혼종성이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제국의 상상
거자오광은 현대국가의 틀로 전통 제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일에 반대한다. ‘안’과 ‘밖’이 명확히 구분되는 현대국가의 관점으로 제국을 이해하면 국제관계에서 위험이 초래될 여지가 많다. 제국에는 ‘안’과 ‘밖’이 없이 멀고 가까움, 원근과 친소만이 있었다. 일부 유가 지식인이 품었던 이상과 달리 제국은 바깥을 향해가는 동심원이었고, 제국 내에는 등급의 구분과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다. 문제는 현재의 중국이 전통 제국에서 이어지면서 지금도 제국의 상상이 역사적 기억과 의식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거자오광의 지적대로 전통 제국과 현대 국가는 많은 점들이 다르다. 그것을 단순한 연장으로 이해하면서, 현재의 영토 개념으로 제국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현대의 우리가 현재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을 피할 수는 없지만, 현대의 개념이 역사적 사실과 만나 모호해지거나 충돌된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역사상 ‘안과 밖’의 경계를 이해하면 ‘중국’을 역사적 과정 가운데 놓고 볼 수 있다. 역사 가운데 ‘중국’을 놓고 보면 현대 중국 영토의 기준으로 중국 제국을 상상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원일체’에 대한 무리한 주장을 비롯하여 지금 현대국가 중국이 가진 많은 문제들은, 남아있는 전통적 제국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국제 질서 속에서 주권과 외교의 문제를 과거의 조공체제와 연관시키지 않는 문제는 중국의 현실 적응과 관련하여 굉장히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