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 11장 생명 거주 가능 영역이라는 덧없는 축복, 12장 인류세를 살다, 13장 가능한 세계 칼 세이건이 떠난 후 앤 드루얀이 다시 쓴 <코스모스>는 ‘가능한 세계들’에 대한 열망으로 끝을 맺는다. 인류세 이후 지구가 맞닥뜨린 위기를 극복하고, 인류는 태양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거주할 행성을 찾아 떠난다는 상상. 앤 드루얀은 이 상상을 낙관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 상상이 과학의 힘으로 가능하리라는 낙관이다. 책의 시작부분에서 인용했던 아인슈타인의 말이 다시 등장한다. “대중이 과학의 성취를 그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에서 칼 세이건을 경유하여 앤 드루얀까지 이어지는 과학에 대한 예찬에는, 안타깝게도 지식에 대한 반성의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이 순진한 과학자들의 말대로 지식이 선량하게 이용될 수 있을지 모르나, 지식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오히려 푸코의 말대로라면, 지식-권력이라는 형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지식과 권력은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식과 마찬가지로 권력 역시 그 자체로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다만 지식-권력이 스스로를 옹호하거나 선하다고 믿는 순간, 거기에는 얼마든지 파괴적인 힘이 깃들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정부는 원자폭탄으로 인명을 살상하겠지만, 자신이 속한 나라의 정부는 그들이 만든 원자폭탄으로 인명을 구하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가졌던 과학자들의 경우처럼. 앤 드루얀이 칼 세이건의 의견에 조금만 더 반성적 태도를 보였다면, 스스로가 말했던 과학의 미덕처럼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진리를 갱신하려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는 칼 세이건이 가졌던 이중적 태도의 모순을 충분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미화하는 태도는 스스로의 선택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한 방어이다. 그런 방어를 통해 칼 세이건의 의견들은 갱신되지 못한 채 박제되어 버린다. 누구나 틀릴 수 있고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과학의 명제 역시 앤 드루얀은 배신한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세계를 우주로까지 확장시키려는 앤 드루얀의 오류는, 칼 세이건이 꿈꿨던 성간여행이 당시의 시대조류이기도 했던 제국주의적 신념에서 비롯되었음을 애써 무시하려는 데에서 시작된다. 이 책의 큰 줄기 중 하나가 그 성간여행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앤 드루얀은 성간여행이 꼭 필요한 이유로 태양의 수명이 다해 지구가 생명거주 불가능 지역이 되리라는 예상을 꼽는다. 그 시기는 수억 년 이후이다. 이 책의 다른 큰 줄기는 지구에 끼치는 인류의 영향, 인류세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학자들은 수퍼컴퓨터로 정확한(!) 계산을 마쳤다며 ‘재앙이 임박했다’고 떠들어댄다. 지구에 재앙이 임박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수억 년 이후의 태양 소멸을 걱정하며 행성이주를 준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구의 환경재앙 임박과 수억 년 이후를 대비한 행성이주 계획 사이에 놓인 논리적 모순과 엄청난 간극. 그 사이에서도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할 일과 과학자 아닌 이들이 할 일을 구분하여 떠들어댈 뿐이다. 일단 인류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측정과 계산은 과학자들의 몫이다. 과학자들은 정확한 계산을 마쳤다 하면서도 구체적인 시기는 특정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사이비 교주처럼 ‘재앙 임박’과 ‘지구 종말’을 떠들어대며 인류의 이기심을 개탄한다. 그러면 선량하고 싶은 인간들이 방법을 묻는다. 물론 개인 차원에서 대처할 방법은 많지 않다. 오히려 과학자들의 역할이 인류세에 대처할 방법을 개발하여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있지 않은가. 수많은 내연기관 기계들과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었던 과학자들이야말로 이제 스스로를 반성하고 다른 역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최근에 어떤 일을 하면서 과학에 종사하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 중에는 친환경 냉난방 기술과 전기자동차 관련 개발 등이 많았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산업의 패러다임은 빠르게 변화하는 중이다. 우리는 수십 년 내에 원하지 않아도 각종 친환경기술로 만들어진 제품들을 구매하고, 사용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인류세를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산업이 새로운 제품의 수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선량함보다는 자본주의가 과학자들의 야심찬 기획과 함께 우리의 삶을 바꾸게 될 터이다. ‘인류세’라는 개념 역시 자본주의적으로 소비되고, 자본주의에 의해 극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어쩌면 비관적으로 말해도 될까?
2020년의 우리는 팬데믹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 1년이 저물어가는 요즘 나는 ‘인류세’라는 용어 역시 인류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개념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을 때가 많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하고, 우리가 속한 태양계마저 우주의 변방이라는 사실에 실망했던 이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셈이다. 인류는 지구에서 아주 잠시만 존재하는 생명체일 뿐인데, 마치 지구가 큰 위기를 겪는다면 그건 우리 인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착각 말이다. 인류가 만들어놓은 문명들은 고작 1년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큰 위기를 겪는다. 인류가 위협받을수록 지구는 빠르게 회복된다. 어쩌면 인류의 진짜 잘못은 이기심보다는, 자신의 역할을 과장하는 어리석음에서 오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인류가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부터 버리자. 가능한 세계는 우리 인류의 세계가 아닐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