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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중국] 도대체 왜 여자는 과거시험을 볼 수 없단 말인가!2021-01-1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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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차이나 리터러시_글쓰는 여자는 잊히지 않는다_456장 발제.hwp (91KB)

글쓰는 여자는 잊히지 않는다4, 5, 6(후궁 좌분, 기녀 설도, 여도사 어현기)

 

김은희라는 시나리오작가가 있다. 드라마 <시그널>과 넷플릭스 <킹덤>의 작가로 더 유명하다. 로맨스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도 썼는데, 사람들의 기억에는 독특한 장르물을 잘 쓰는 작가로 남았다. 김은희의 남편은 영화감독 장항준이다. 장항준은 자신을 소개할 때 김은희 작가의 남편이라고 소개한다.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이 김은희와 결혼한 일이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 장항준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여자들이 어린 시절 로맨스소설 읽을 때 우리 아내는 무협지를 읽으며 컸다.

김은희 작가의 작품과 별개로 이 말은 여러모로 논란의 소재가 되었다. 일단 여자들이 로맨스소설을 읽으면서 큰다는 전제부터가 논란이다. 장항준은 아내인 김은희의 성향이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이 여성 일반에게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드러낸다. 그 선입견에는 여성들이 읽는다는 로맨스소설에 대한 비하가 깔려있다. 비교의 대상은 남성들이 주로 읽으리라 장항준이 예상하는 무협지이다. 로맨스소설을 읽으면서 자랐든 아니든 간에 장항준의 인터뷰를 접하고, “지가 뭔데 그런 평가를 해?”라는 반응을 보이는 여성들이 많았다.

현대에도 여성의 삶을 평가하는 많은 발언의 주체는 남성이 될 때가 많다. 평가나 인정은 시혜적으로 이루어질 때가 많으며, 그 자체로 권력 행사이다. 그런 시혜적 평가행위 속에서 여성의 삶이 얼마나 현실과 부합하게 묘사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평가의 발언들(칭찬의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을 하는 주체는 자신이 여성의 삶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응원한다 여기고 있으리라. 여성들이 자신들의 평가와 인정을 원한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특히 고대 중국 여성들의 삶을 기록한 이 책을 읽으면서 여성의 삶을 평가하는 일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고대에도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었을 테고, 기록하는 이가 여성이라 해도 남성의 시각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여성이 어떤 시각을 갖는 일 자체가 어려웠던 시대이다. 그 기록으로 이 여성들을 접하는 우리 역시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뻔한 문장 속 구태의연한 묘사들로 표현되는 후궁 좌분, 기녀 설도, 여도사 어현기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덜 전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먼저 세 사람의 삶을 욕망이라는 주제로 한 번 묶어보겠다. 세 여성은 모두 강한 욕망을 드러냈던 인물이다. 동시대의 남성만큼, 혹은 타고난 재주 때문에 남성들 이상으로 출세와 생존에 강한 욕망을 품었던 이들이다. 과거시험 합격자들의 이름이 붙은 방을 보며 도대체 왜 여자라고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것일까?”(134)라고 한탄했던 여도사 어현기의 일화에서 그런 욕망이 강하게 드러난다.

글쓰는 재주로 가족들의 출세길을 열어준 좌분 역시 마찬가지다. 좌분이 받은 후궁이라는 직위는 왕과의 혼인보다는 벼슬의 개념에 가까워 보인다. 여성이기에 벼슬을 줄 수 없어 후궁의 직위를 주었으리라. 시대에 따라 법도가 달라진다고 주장했던 좌분과 달리 남성들은 법도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후궁이 되면서 낙양에 입성한 좌분 남매는 황제가 시키는 대로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하고, 황제 가족들의 삶을 찬양하는 데 자기 재능을 아낌없이 이용했다. 쓰임이 다한 뒤에는 아마도 외롭게 죽었으리라.

글재주 때문에 기녀가 되었으나, 실상은 남성 문인들의 글쓰기를 도우며 교류했던 설도의 삶은 어떠한가. 설도의 재주와 역할을 알아본 절도사가 설도에게 관직을 주자고 요청했으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공식적으로 여교서 역할을 하던 설도는 작은 실수로 남성들의 세계에서 추방된다. 남성들의 인정은 한때의 시혜였으며, 언제든 쉽게 철회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녀의 삶을 접은 설도는 여도사의 옷을 입고 색이 고운 편지지를 만들면서 여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설도가 기녀임에도 농염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글들을 남겨 의외라 말한다. 여성들의 외로움을 한탄하던 궁원문학에서 벗어난 후궁 좌분의 글에도 비슷한 평가를 한다. 황제를 사모하고 그리는 글보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글이 많아 독특하다는 평이다. 여도사 어현기의 글은 또 어떤가. 정치적 쟁점에 관한 사항이나, 관리들에게 충고와 당부의 말을 남기는 글을 쓰기도 한다. 사랑 이야기를 쓴다고 하여도 마지막에 가서는 세상에 널린 것이 남자고, 그중에서 송옥처럼 잘생기고 멋진 사람을 찾으면 그만이지, 어찌 날 버린 그 박정한 옛 남자에게만 미련을 둘 필요가 있나?”라고 마무리한다.

 

장항준 감독이 여성들은 로맨스소설을 읽으며 자란다고 믿듯이, 사람들은 여성들이 사랑 이야기만 되풀이한다고 말한다. 실상은 여성들에게 사랑 이야기 말고 과연 무엇이 허용되어 있을까? 물론 사랑도 허용되지는 않았다. 후궁이나 기녀, 여도사라는 특수한 신분이 황제에 대한 사랑 표현이나 비교적 자유로운 연애를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어찌 보면 당시의 여성이 탁문군처럼 자신을 사랑의 주체로 표현하거나, 어현기처럼 미련 없이 다른 남자를 만나겠다 다짐하는 일 자체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지금도 여성들에게 로맨스는 여전히 환상이고 불가능한 꿈이다. 여성들이 평생 어울려 살아야 할 남성들은 시대가 바뀐다고 자연스레 법도를 바꿀 마음을 먹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좌분이 살았던 시대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마찬가지다. 로맨스소설을 읽는 여성이 많다면, 그들은 불가능한 꿈을 꾸는 이들이다. 좌분과 설도, 어현기처럼 그들도 욕망을 앞세워 불가능한 탈주를 꿈꾸고 있다.

들뢰즈는 욕망을 생성의 관점에서 다시 보았다. 음습한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힘, 들뢰즈에게는 이 생성의 힘이 욕망이다. 우리는 이 욕망 덕에 살아왔고, 앞으로의 삶도 꿈꿀 수 있다. 좌분과 설도, 어현기도 이 생성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면서 살았다. 다만 부단한 욕망이 방향을 잃고 폭주하지 않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질투에 휩싸여 살인을 저질렀다는 어현기의 마지막 행보가 그런 폭주는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욕망을 억누르는 일은 생성의 힘이 파괴의 힘으로 변모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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