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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은 "귀가 밝은 사람"이다. 귀가 밝은 사람은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이다. 소리를 잘 듣는다고 하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일차적으로 신의 소리를 잘 듣는 것이요, 인문정신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소리를 잘 듣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과 땅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총명한 사람이요, 달통한 사람이요,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총명한 사람, 신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사람의 소리를 잘 알아듣는 자만이 통치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 동방의 지혜 즉 성聖은 구체적인 인간 통치의 슬기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110~111쪽)
<노자>의 청자, <노자>의 화자는 누구일까. 이에 대해 김시천은 천하의 대권 후보자일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노자> 역시 어떻게 백성을 다스릴지에 대해 논하고 있는 책이라는 말이다. 과연 모든 내용을 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흥미로운 접근이다. 저자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저자는 <노자>의 '숨은 주어'가 성인이라 본다.(109쪽) 실제로 <노자> 본문을 읽어보면 주아가 많이 생략되어 있다. 비단 <노자>만 그렇겠는가. 문장마다 주어를 빼놓는 법이 없는 서양 문장과 달리 한문에는 주어가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누구의 말인지, 누구를 위한 말인지를 따져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성인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는 성인의 모습과는 다를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고대 사회에서의 '성聖'이란 총명聰明, 지혜로운 사람을 가리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사대부들은 '배워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노자>가 성인에 대해 말한다고 할 때, 성인이 되러면 이래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무릇 성인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요컨대 성인과 '나'의 관계가 명료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대권도 반드시 그러한 성인의 품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193쪽) 이런 저자의 주장을 보면 성인이란 뭇사람들과는 멀리 떨어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점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무릇 '대권'이란 한 사람만이 손에 쥘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전제왕권 시대였고, 오늘날 우리는 민주공화제를 산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이 정치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과연 '노자식의 정치'는 기존의 정치와 어떻게 다를까?
1장에서 서구와 다른 동양의 정신에 대해 논했다면 2장 이후에는 저자의 입장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저자는 <노자>를 오독한 역사를 비판한다. 한무제 시대의 '파출백가 독존유술' 이후 '반유가적 정서'로 <노자>를 해석한 것, 민중 종교인 도교의 입장에서 불로장생을 중심으로 해석한 것, 근세 서양 사상가들의 초월주의적 해석, 개화기 중국의 의고풍을 모두 비판한다.
유가와 도가의 대립, 혹은 공자와 노자의 관계에 대해 여러 말들이 있다. 누가 먼저니 누가 앞서니 하는 식으로 논쟁을 벌이곤 하는 것이다. 저자는 <노자>가 사실상 중국 철학의 가장 핵심에 위치한다고 본다. 따라서 공자도 노자로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자>와 <장자>에 대한 관점도 재미있다. 도식적으로 나눈다면 <노자>는 "몸(身/mom)"을 이야기한 반면 <장자>는 마음(心)을 이야기했다. 물론 이때 몸과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한참을 논의해야겠지만, 저자는 '몸'을 더 중시하는 입장이다. 구체적인 몸을 배제한 추상적인 마음에 대한 추구, 저자가 비판하는 '도덕주의적 엄격주의'나 '주자학 정통주의'(191쪽)의 병폐는 마음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한다고도 할 수 있다.
노자는 인격의 주체로서 "몸"을 말하는데, 장자는 인격의 주체로서 "심"의 제 현상을 어떻게 장악하느냐 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사실 불교는 노자를 통해서 들어왔다기보다는 장자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다. 장자는 심재心齋와 같은 정신결제를 설하였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을 결하고 있었다. (190쪽)
혹자는 마음의 철학을 주장하겠지만 저자는 '몸의 철학(Philosophy of Mom)'을 주장해왔다. <노자>에서 몸, 곧 신체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계속 지켜보도록 하자.
중간에 실린 마왕퇴 백서, 곽점 초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무덤에서 발견된 <노자> 텍스트 일부는 <노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노자>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통행본 <노자>가 기원전 500년 전부터 큰 차이 없이 전승되었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노자> 주석으로 유명한 왕필의 해석을 많이 참고하고 있다. 또한 이충익의 해석도 함께 참조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노자>는 기원전 6세기경 <노자> 완결된 택스트로 완성되었다. 그 저자는 성인을 꿈꾸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과연 그는 누구였을까. 과연 그는 어떤 세상을 바랐을까? 천하가 어떤 모습이기를 기대했을까?
81장까지 성인이라는 숨은 주어는 계속된다. <노자도덕경>이라는 텍스트는 이제 그 물리적 현존성이 BC 500 전후까지는 확실하게 올라간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도덕경>이라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의 저작물이 누군가에 의하여 집필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그 저자는 도대체 이것을 누굴 위하여 쓴 것인가? (109쪽)
종종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중국은 땅이 넓기도 하지만 깊기도 하다고. 어느 날 중국의 넓은 땅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작은 천조각, 혹은 나무 조각이 나와 또 다른 토론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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