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 ‘도피’(응우렌 응옥 뚜)/‘셰리스 아주머니의 애프터눈 티’(런밍웨이)/‘절연’(정세랑)
: 끊어내거나 죽거나, 그림자를 밟고 길 위에 서서
이번에 읽은 단편들은 모두 절연하고자 하는 열망과 두려움, 혼란과 흔들림에 대해 다루고 있다. 끊어내고 싶은 것들에는 자신의 일부가 어떤 식으로든 포함되어 있다. 결국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끊어낼 수 없다. 그것은 죽음과 같다. 응우엔 응옥 뚜의 <도피>와 런밍웨이의 <셰리스 아주머니의 애프터눈 티>에서 죽음은 은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도피>에서 화자는 아들 바오로부터 달아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아들의 무리한 요구에도 “아, 그럼 그래라”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에 깃든 실망과 체념은 아들에 대한 갈망과 기대 때문일 것이다. 화자가 도피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갈망과 기대가 아니었을까.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된 화자는 말한다. “그러고도 끝끝내 떼치지 못했네.” 결국 아들의 무관심과 안개로 표현되는 혼란 속에서 화자는 죽어간다. 그녀는 도피에 성공한 것일까? <셰리스 아주머니의 애프터눈 티>에서의 죽음은 이슈마일, 슈리, 앤더 세 인물이 처한 불안한 현실을 상징화한다. 세인트루시아라는 아메리카 중부의 섬은 오랜 기간 프랑스, 영국의 통치를 받다가 1971년이 되어서야 독립한다. 대만에서는 세인트루시아에 자원봉사를 보내고 원조 지원을 하고 있지만 대만 역시 여러 나라로부터 단교를 당하며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한 상태이다. 대만에서 온 슈리는 흑인인 원주민 친구들과 달리 황인이라는 소외감과 함께 대만을 떠나왔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과거의 친구와 태어난 아시아의 토지에게까지 미안해한다. 그리고 대만을 떠난 것처럼, 언제라도 세인트루시아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반면 슈리의 도움을 받게 된 이슈마일은 동정 따위 받고 싶지 않다며 이런 수혜로는 자신의 국가가 대만과의 단교를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앤더는 탁구를 계속하고 싶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이 섬을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이슈마일과 갈등하는 방식으로 열등감과 혼란을 드러낸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새집. 언제나 휠체어에 앉아 있던 새집과 새집을 지키는 셰리스 아주머니. 아이들은 새집을 그리워한다. 아마도 새집에 스스로가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투영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새집에 저항하고 어른의 세계로 달아나려는 이슈마일, 우울감과 소외감을 새집과 함께 공유하는 슈리, 막연한 쓸쓸함과 열등감을 위로하는 대상을 새집으로 삼는 앤더. 아주머니가 차려놓은 음식을 들고 달아났을 때, 슈리가 보았던 아주머니의 미소는 어쩌면 그들이 잊거나 버려야 하는 유년의 마지막 다정한 인사가 아닐까? 어떤 식으로든 아이는 어른으로 자라고, 과거의 아이는 죽게 마련이다. 정세랑의 <절연>은 미묘하고 복잡한 현실적인 문제를 피해자인 여성의 입장에서 심리와 감정을 섬세하게 파헤치고 있다. 폭력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은 법과 제도의 문제도 있겠지만 객관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다. 형우가 윤찬에게 사회에서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해 형우과 선정은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아량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가족이기주의의 발로일 수 있다는 작가의 지적은 날카롭다. 형우가 가은에게 피해를 당했을 때 왜 폭로하지 않았냐는 힐책, 결혼 전 다른 남자에게 끌렸던 일을 상기시키는 선정의 말은 친분으로 포장한 명백한 폭력이다. 그리고 그 폭력을 일삼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으며 어쩌면 나 역시 예외가 아닐 지도 모른다.
미투가 한창일 때, 나 또한 내가 당한 피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내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부끄러움과 만연해 있는 남성들의 교묘한 폭력 등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되었다. 관계의 단절은 어쩌면 침묵을 깨고 다른 새로운 연결을 향해 가는 것일 것이다. 요철이 있는 길을 흔들리고 휘청거리며 얼마를 걸어야 할까? 가은의 들리지 않는 각오와 함께 질문이 머릿속에 안개처럼 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