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H₂O인가?》 2.3 전해질 용액 속 깊숙이/3.1 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셀까? 발제
미결정성에서 과학의 성취가 나온다
19세기 전기화학은 불확실하고 지저분했다. 수많은 논쟁과 이론들이 경쟁했다. 저자 장하석은 이런 양상이 유용한 발전들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합의된 이론으로 종결되는 것만이 옳다는 전제를 반박하고, 과학은 거의 늘 다원주의적 면모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교과서나 과학사는 성공 이전과 이후의 지저분한 상황을 무시하지만, 저자는 이런 관행을 따르고 싶지 않다. 저자는 라부아지에의 산소혁명 이후에도 플로지스톤 이론을 고수한 프리스틀리의 전기분해 실험을 직접 검증해 보고, 현대적 관점에서 탐구할 가치가 있는 과학적 질문들을 도출하기도 했다. 전기분해에서의 이온 운동에 대한 논쟁과 볼타 전지의 작동 방식에 대한 논쟁도 의미있는 관점들이 많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낭만주의 과학이 배척당한 이유에 대해서도 다방면으로 분석했다. 특히 리터의 이론이 배척당한 이유로 네 가지를 꼽았다. 리터의 문체가 워낙에 풍부하고 산만하여 이해할 사람이 없었다는 점, 세간의 이목을 끌 만큼의 출판물을 낼 수 있는 전략가가 아니었다는 점, 자연철학적인 연구(예를 들면 수맥 탐지용 막대) 또한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 라부아지에의 정통파에 맞섰다는 점 등을 요인으로 꼽았다. 즉, 원리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었다기보다 특유하고 상황의존적인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3장에서는 물의 물질적 조성을 다루는 원자화학을 다룬다. 물이 H₂O라는 명제는 지금은 상식이다. 그러나 처음 채택된 물의 분자식은 HO였다. 물은 H₂O라는 합의에 이르기까지 50여 년이 걸렸다. H₂O로 안착하기까지 아주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개별 원자들을 직접 관찰할 길이 없었다. 관찰할 수 없는데 어떻게 원자들의 개수를 셀 수 있었을까?
우리는 최초의 화학적 원자론이 존 돌튼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돌튼은 화학물질들이 서로 결합할 때는 따르는 비율의 규칙성을 원자들의 무게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돌튼의 원자론은 우리가 아는 원자와는 달랐다. 돌튼은 원자가 작고 단단한 핵과 그것을 칼로릭이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했고, 칼로릭이 퍼져있는 대기가 원자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칼로릭 대기를 받아들인 돌튼은 개별 원자/분자들을 털이 난 것처럼 표현했다(그림 3-2). 또 물 분자가 단순하다고 추측했기 때문에 최고로 단순한 조성인 수소 원자 하나와 산소 원자 하나의 조합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물의 분자식이 H₂O임을 알려면 수소와 산소의 원자량을 알아야 하고, 원자량을 알려면 다시 분자식을 알아야 하는 순환성에 빠진다. 최대 단순성의 규칙을 가져와 1:1의 결합인 HO를 주장한 돌튼의 방식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용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대다수는 돌튼의 단순성 규칙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물의 분자식은 해결되지만 다른 화합물의 조성에서 규칙성이 깨지기 때문이다. 원자량을 다루는 다양한 방식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게이뤼삭은 무게가 아니라 부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기체들이 서로 화학적으로 반응할 때 아주 단순한 부피 비율로 반응한다는 규칙성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동일한 부피의 모든 기체는 동일한 개수의 입자들을 보유하고 있다(이븐EVEN)는 전제가 필요했다. 돌튼의 무게 개념과 게이뤼삭의 이븐 개념을 받아들여 현대적인 2원자 분자 개념을 수립한 사람은 아보가드로이다. 분자식으로 표기하면 2H₂O+O₂=2H₂O. 그러나 아보가드로는 왜 동일한 유형의 원자 2개가 서로 달라붙는지, 또 달라붙는다면 왜 그런 뭉치가 원자 2개에서 종결되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보카드로의 이론은 50년 후 칸니차로에 의해 빛을 보게 된다. 칸니차로는 화학적 표기법과 원자량의 통일을 목적으로 열린 1860년 카를스루 회의에서 자신의 이론을 발표한다. 결정적인 한방은 없었지만 이미 널리 유통되던 다양한 생각들을 잘 정리한 내용이었다.
무게 뿐 아니라 부피를 통해서도 원자를 개념화할 수 있을까? 점으로 이미지화된 입자 개념을 기체 상태로 상상하는 게 익숙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피 측정에 기초한 사고의 진짜 위력은 나중에 ‘원자가’ 개념을 통해 드러난다. 아우구스트 빌헬름 호프만은 부피 측정에 기초하여 확증된 원자들의 상대적 개수들을 구성했다(1865). 호프만의 생각은 실험적 작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19세기 중반 원자화학자들 다수가 공유한 전형적인 태도다. 이들은 실험적 작업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이론적 생각을 진지하게 취급했으며, 그런 연결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고 발명하고 확보하려 애썼다.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표준적인 철학적 분류의 틀에 집어넣기가 어렵다. 가능한 최고의 생산적 방식으로 탐구를 이어가면서도 무엇이 가능한가에 관한 한계들을 인정하는 실용주의적 정신이 존재했다. 19세기 원자화학에서 가장 값진 진보는 불확실성을 참아내며 현실에 충실하게 수행한 이론적 경험적 탐구에 의해 이루어졌지, 교리적 명확성이나 공리적 제일원리의 고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자-분자적 조성에 관한 다양한 경쟁 이론들은 모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증거들과 양립 가능했다. 이는 이론이 증거에 의해 불충분하게 결정된다는, 과학철학에서 많이 논의된 ‘미결정성’ 문제의 한 사례이다. 원자량에 관한 의견의 불일치는 분자식에 관한 의견의 불일치와 엮여 있다. 이는 또한 이 분야의 더 깊은 분열 및 다원성과도 연계되어 있다.
일부 철학자들은 다수의 이론들이 존재할 가능성과 어떤 이론도 확실성을 보유하지 못한다는 점을 환영한다. 다른 철학자들은 미결정에 강한 불만을 느끼면서, 모든 증거가 확보되면 각각의 영역에서 단 하나의 이론이 참된 이론 혹은 가장 좋은 이론으로서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반된 두 관점은 아주 많은 철학적 논쟁을 유발했다. 19세기 화학원자론의 역사에 관한 저자의 연구는 이 논쟁을 벌이는 양편이 어떻게 핵심을 놓치는지 보여준다. 강조할 사항은 이것이다. 위대한 과학적 성취들은 미결정성을 육성하는 것에서 나오지, 미결정성을 제거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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