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의 뒹굴뒹굴주의자여 단결하지 말지어다 –
단결하려면 일어나야 하기에 에레혼
챌린지의 천국이 도래했다. 뭐 그리 세상에 도전(challenge)해야 할 일이 많은지. 얼리버드 챌린지, 무지출 챌린지처럼 비장한 다짐이 필요한듯 보이는
도전 과제도 있는가 하면, 아이돌 안무를 따라 추고 동영상 플랫폼에 업로드 하는 일도 챌린지라고 뭉뚱그려진다. 기괴한 행동을 하고, 이를 인증샷으로 남기는 일조차 챌린지라 불리기도 한다. 하다하다
바닥에 드러눕는 일에도 챌린지라는 명칭이 붙었다. 2018년, SNS에는
위의 왼쪽 사진처럼 넘어지는 모습을 올리는 놀이가 유행했다. 이름도 거창한 “폴링 스타 챌린지”. 이 챌린지는 그냥 넘어지기만 하면(falling) 그만인 것이 아니라, 부를 가진 셀럽(stars)이 마치 연출된 것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품을 바닥에 모두 쏟는 연출을 가미해야 한다. 물건을
어떻게 배치해야 더욱 효과적으로 부를 과시할 지 고민하는 과정이 도전적인 일이라면, 그들에겐 나름대로
챌린지인 셈. 아무튼 당시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부자들의 전유물처럼 유행했던 폴링 스타 챌린지는, 눕는 것도 누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들에게) 거창한 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2023년이 되자 중국 대륙에서 또다시 바닥에 드러눕는 청년들의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펑요췐(朋友圈, 위챗의 SNS 기능으로
우리나라의 카카오 스토리와 유사함)에 자신들의 졸업사진을 올리면서 오체투지하고 있는 장면을 첨부하였다. 여기에도 티아오짠(挑战, ‘도전’ 이라는 한자를 중국어로
읽은 것으로, 챌린지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앞에 오는 단어는 탕핑(躺平)이라는, 자조성 짙고 열패감으로 가득찬 말이었다. 중국 청년이 드러눕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세계로
퍼지자, 사람들은 각자의 입맛대로 이 현상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땔감 위에서 누워 자면서 쓸개의 쓴 맛을 보았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를 떠올렸다. 또 어떤 이는 자기 마음대로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자기 진가를 감추고 그림자 아래에서 힘을 키우는 중국적 처세술을
말하였다. 그러나 지금 평평하게 눕는[躺平]
이들은 무릎을 꿇어서 되려 추진력을 얻는 준비 자세에 돌입한 게 아니다. 이들은 그냥 누워있다. 싱겁게 들리겠지만 이들에게는 거창한 뜻이
없다. 탕핑이라는 단어가 중국 SNS를 달궜던 2021년 즈음의 상황을 보자. 2020년 코로나 발생은 중국 청년들에게 모든 게 꼬이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소비 시장은 얼어붙었고 손해를 줄인다는 명목 하에 기업의 채용률은 급감했다. 중국 정부는
청년 세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그 가운데 짚어볼만한 것이 바로 대학원 입학
정원을 늘린 정책. 2020년 중국의 대학원 정원은 1년
전보다 23퍼센트 증가했다. 실업률 지표를 관리하기 위해
취업을 유예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할까. 이런 정책은 ‘석/박사
학위가 있으면 더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상식처럼 통용되는 중국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환영받기도 했다. 중국에서 2023년은
2020년 대학원 석사 과정 입학생, 소위 ‘코로나 학번’이
졸업하는 시기이다. (중국의 대학원 석사 과정은 대부분 3년제이다.) 이들은 유예된 행복을 이제 돌려받을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코로나 비상 시국 해제 이후 경제 지표를 들여다 보면, 중국이
저성장 사회로 진입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오히려 코로나에 고마워해야 할 판국이다. 이 역병을 경제 성장 둔화의 원흉으로 지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코로나라는 욕받이가 퇴장한 (것처럼 보이는) 작금의 중국
사회는 누구를 탓해야 하나. 그저 ‘방역과 통제 이후를 대비 하지 않은 내 탓이오’ 하며 자조섞인 말을
내뱉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중국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납작 엎드린 사진을 SNS에 올리고 처량하게 낄낄대는 이유이다. 여기까지만 적으면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으리라. 대학원에 가지 않은 사람은? 그리고 대학이나 교육
제도 바깥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현시점의 중국 사회를 살아나가고 있나? 농민공이나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누군가의 모습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특권처럼 비춰진다. 격리와 봉쇄가 지리멸렬하게 이어진 2년간, 방안에서 뒹굴뒹굴 거리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공동구매한 식료품을
배달하고 방역복을 입고 택배를 나르는 이도 있었다. 이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에서는 배달원들이 코로나를
옮길 수 있다며 단지 출입을 막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이들 역시 지난 2년 동안 누워있었다. 그들이 평평하게 누운 것은 자조 때문도 아니었고, 스스로를 밈으로 만드는 일도 아니었다. 농민공들은 먹고 살기 위해
‘필수 인력’으로 불리며 노숙해야만 했다. 중국에서 봉쇄가 심해지고 나서 배달원들은
자신들이 사는 거처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사는 곳으로 들어갔다가 봉쇄되면 배달을 할 수 없게 되니 자발적으로 노숙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와식생활을 전전해야 했던 노동자들. 이들이 코로나가 창궐하는 기간동안 자발적으로 바닥에 스스로를 납작 엎드린 세대라고 비아냥대고, 학사복 더러워지는 것을 감내하며 인증샷을 찍는 대학 울타리 안 청년들의 심정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질문의 방향이 달라져도 냉소적 시선을 거두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다. 자기개발의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영위하겠다는 대학(원)생들은 자신들보다 더 낮게 엎드려서 누워있는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탕핑이라는
용어는 중국의 사회 모순을 설명할 수 있는 적합한 용어가 될 수 있을지언정, “주의” 또는 “이즘”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드러눕는 데에 무슨 신념이나 견해가 존재한단 말인가. 중력이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편하게 누으면 그만인 것을. 탕핑주의라는
말을 만들어 유통하는 이들은 높은 확률로 두 부류 중 하나에 속한다. 1번 유형, 중국 공산당의 전복을 오매불망 바라는 사람들. 2번 유형, 중국 내 불복종하는 시민의 탄생을 고대하던 선생님들. 이런 삐딱한 생각 때문인지 “만국의 탕핑주의자여
단결하라”는 <탕핑주의자 선언>을 보고서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그 문장이 지나치게 거창하고 엄숙해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탕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단결하는 모습을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버렸기 때문에 나온 웃음이기도 하다. 누워있는 이들이 대체 무슨 수로, 그리고 무슨 목적을 위해 연대하고
단결한단 말인가. 꿈틀꿈틀 기어서 시민 불복종을 외치기라도 해야 하는지, 혹은 단결을 위해 잠시만 두발로 걸어서 모인 다음에 다시 드러누워야 하는 건지. 모름지기 누워있는 자들이 하는 생각은 딱하나 밖에 없다. ‘더욱
격하게 누워있고 싶다.’ 눕는 것 정말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전하는 증언이기에 믿어도 좋다. ‘뒹굴뒹굴’이라는 의태어와 ‘단결’이라는 명사처럼 안 어울리는 말 조합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