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관한 질문들》 1부 국가의 근거들 국가는 언제부터, 어떻게 존재하였을까? 이런 물음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을 테다. 국가 중심의 역사를 배워온 우리는 고대부터 국가가 존재했다고 믿어왔다. 그 고대의 국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의 국가와 같은 국가일까? 그렇다면 근대의 국가는 고대의 국가로부터 영토와 국민을 물려받았을까? 누가 근대 국가에 영토와 국민이라는 유산을 물려주었으며, 근대 국가는 어떻게 유산을 물려받을 자격을 획득했을까? 어리석은 질문은 자명해 보이는 대상을 향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명백하게 의도가 있다. 대상의 자명함을 깨뜨리려는 의도이다. 《국가에 관한 질문들》이라는 제목의 이 책 1부에서는 국가의 근거를 둘러싼 이야기가 전개된다. 놀랍게도 국가의 근거는 우리의 예상만큼 명쾌하지 않으며, 국가의 근거를 해명하려는 의도에도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다. 국가의 근거를 해명하는 일 자체가 국가의 존속 이유가 되며, 국가의 척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근거에 대한 사유들은 전쟁과 혁명에 대한 사유와 관련된다. 18세기 말에는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3)과 프랑스혁명(1789~)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특히 프랑스혁명에, 그중에서도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들보다 혁명을 종결시키려던 사유들에 주목한다. 이 지점에서 개인들을 개별적 권력이 아닌 법질서에 종속시키는 적법성 원리와 법이 스스로 정당성을 끌어내는 ‘주권’적 역량의 문제가 드러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 권력은 주권적 역량에 의해 가능하거나 불가능해진다. 그 역량을 가능하게 하는 이상을 인민(people)이라고 부른다. 인민은 시민들 공동의 의지이고, 루소는 이를 “일반의지”라 불렀다.(27쪽) 혁명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고, 혁명을 종결시키는 방법도 마찬가지로 다양했다. 국가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분석은 이 다양한 논의들 속에서 뻗어나갔고, 국가와 인민의 관계도 새롭게 성찰되었다. 혁명기의 공화주의자들에게 중심적인 개념은 사회계약의 이념과 “자연권” 이념의 접합이었다. 자연권은 고대 라틴 전통에서 신분상 세습 권리에 대항하는 인간 본연의 권리로 이해되었다. 사회계약은 개인들이 자연권을 전부 포기해야 가능해지는데, 자연권에서 사회계약의 주체(정치적 주체)를 넘어서는 부분이 있다는 견해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주권을 구성하는 일반의지(인민)와 이를 초과하는 개인, 그러니까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문제였다. 국가 기원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이들 중 저자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사상가는 영국 근대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이다. 버크를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은 혁명에 반대하면서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동시에 구질서로부터도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복고가 아닌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낸다. 버크는 추상적 평등과 자유의 절대 원리들에 반대하며, 가족-사회공동체-왕국이라는 층위로 연결된 사회-정치적 공간과 타협의 메커니즘을 강조했다. 버크는 자연권 이론과 사회계약 이론의 종합을 끊으려 했는데, 이 단절에서 두 개념의 의미는 변화된다. 버크에게는 자연권이 시민사회를 가능하게 하기는커녕 인간의 다른 권리가 배제되어야 시민사회가 가능해진다고 보였다. 이 배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민들로부터 비롯되지 않는, 개인들을 복종시키는 권력이 필요하다. 자연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버크는 전략적으로 자연권과 시민권을 구별하지 않는다. 버크에게 국가는 보편적 질서에 예속되며 총체성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이런 총체성에서 국가를 떼어낸다면 반복과 무질서, 절망만이 남는다. 바다 건너 프랑스의 혁명을 바라보는 보수주의자 버크의 시선에 비하면 자유주의자들이 혁명과 맺는 관계는 훨씬 복잡하다. 한데 묶기도 어렵고 혁명 이전부터 군주와 종교에 모두 반대하며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던 자유주의는, 혁명기의 민주주의 내부에서도 비판적으로 재편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는 혁명주의자들의 자유와 달랐다. 자유주의자들의 자유에는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지 않거나 무관심할 자유까지도 포함되었으며, 사적인 자유에 대한 국가의 제도적 보장도 필요했다. 콩스탕은 이 사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를 포기할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느꼈고, 콩스탕이 주장한 ‘도덕적 교육’이라는 정치적 조건은 토크빌의 사유로 연결되었다. 토크빌은 단체나 협회를 통한 정치적 자유 속에서 모색되는 사적 자유를 강조했다. 혁명 이후 이어진 왕정복고와 제정의 반복 속에서 자유주의는 주권과 정치권력을 재정식화하는 데 힘썼다. 민주주의와 대의제 정부의 존재 이유도 다시 발굴되어야만 했다. 이 흐름은 ‘교조주의’라 불렸고, 프랑수아 기조가 그중 눈에 띄는 인물이다. 기조는 민주주의가 주권의 문제를 강조하는 데 공헌했다고 보고, 정부의 주권을 박탈하는 방식의 혁명이 끊임없이 스스로 정당성을 증명해야 하는 의무를 정치권력에 종속시켰다고 보았다. 혁명주의자들은 기존 정부의 주권을 박탈하고 새로운 주권의 기초로 인민을 내세우지만, 그 기초는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주권이 아닌 자유의 의미이다. 자유는 특정 권력의 정당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 그 자체의 정당성을 묻고 정당한 권력에 복종하기 위해 존재한다. 정당한 권력은 고정되지 않으며, ‘인민 주권’의 선포는 정당한 권력 찾기에 지쳐 전제정치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기조는 주장한다.(61쪽) 정당성은 계속되는 정당한 과정으로서 대의적 과정으로부터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효과다.(62쪽) 국가 권력과 사회 권력이 강렬하게 뒤얽히는 시대에 기조는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통치의 기예에 대한 개념을 끌어내어 대의를 새롭게 규정한다. 대의적 성격의 정부는 사회적 증대를 위해 탁월성을 내세운다. 개인은 정부의 권력을 증대하기 위해 사회적 자유를 이용한다. 대의제적 정부는 탁월성을 통해 인정받으면서 자유를 권력에 결합한다.(65쪽) 주권과 법적 질서 다음에는 nation의 문제가 등장한다. 국민과 국가, 민족 모두 nation이라는 단어로 표현 가능하다. 19세기 이 개념들이 밀접해지며, 담론이 팽창했다. ‘이교도 주민’을 이르는 말에서 언어나 문화공동체를 의미하는 말로, 여기서 직업공동체로 확장되었다가 다시 정치적 의미로 ‘nation’은 확장되고 변화하였다. 1789년 7월 23일 법령은 국민nation을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 전체에 의해 헌법상으로 구성된 법적 인격’으로 규정했다.(67쪽) 무엇이 인민을 국가적 인민으로 만들까? 국가의 주권을 정초하는 토대였던 일반의지(인민)는 국가와 확고하게 결속되면서 동시에 타자의 이미지로 나타난다.(69쪽) 혁명기/전쟁기의 국가는 외부에 대항하며 국가의 보편성을 확보한다. 프랑스혁명 전쟁을 통해 ‘국민/민족’ 국가 구성 담론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영토는 군주정 시대와 달리 국가의 자연적 신체로 이해되며, 자연적 영토가 자유로운 인민 체제의 외연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광대한 영토는 ‘위대한 국가Nation’(제국)의 서막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제국주의는 민족주의적 배타주의와 함께 민족의 보편성 문제도 제기한다. 구질서의 신분적 특권이 철폐되면서, 제3신분은 보편적 존재가 되며 국가 전체가 된다. 이 국민은 주권의 토대이며, 영토라는 (과거의) 공간을 통해 자신의 기원을 재발견한다. 혁명기에 아직 재구성되지 못한 국가는 외부와 충돌하며 주권을 정초하려 하지만, 이 충돌에는 국가적 정초가 이미 전제되어 있다. 이 담론은 식민지 침략과 식민지 해방 전쟁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건설하는 국가의 민족주의는 피식민지 국가의 민족적 정체성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민족을 구성하게 했다. 한나 아렌트는 인민들의 주권적 자유가 위로부터 선포된 자유이며, 민족국가가 소수자 문제에 무능하고 국적 박탈을 통해 전체주의화함을 지적한다. 국적 박탈과 더불어 법과 정부의 치안 권력은 강화된다. 법치국가는 과연 ‘민족/국민’ 국가와 분리될 수 있을까? 국가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헤겔에게 개인은 추상적 전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으로 구성된 역사적 산물이다. (104쪽) 가족, 시민사회, 국가라는 질서가 개인을 매개한다. 헤겔은 국가와 사회를 구분하며, 사회계약 개념으로 개인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이론을 거부했다. 개인들은 이들을 묶는 연대의 형태 속에서 역설적으로 고립된다. 국가는 개인의 의식 속에 뿌리내리며 집단적으로 조직화하고, 개인들의 고립이라는 모순을 통합한다. 헤겔은 국가 안에서 개인들이 계층화되는 모습을 파악한다. 개인은 사회 안에서 자신의 기능을 통해 분화하고, 사회는 개인의 이익을 법적으로 인정해준다. 사회계층 체계는 사회를 분열시키는 모순으로 나아가며, 그 모순은 경제적 생산 발전 영역으로 전치된다. 체계는 모순을 비난하며 극단으로 몰고 가면서, 이 모순이 국가를 통해서만 해소될 듯이 암시한다.(110쪽) 마르크스는 이 불평등의 심화에서 계급을 발견한다. 헤겔은 루소의 일반의지도 거부한다. 백지상태 위에 국가를 재구축할 수 있다는 판단은 환상이다. 헤겔에게 국가의 헌법은 ‘민족정신’이라는 역사적 과정의 결과물이다. 국가가 스스로 구성되는 과정도 민족정신과 일치되어야 한다. 국가는 하나의 총체성이며 권력은 구별되지 않는다. 헤겔은 이 통일성을 구현하는 주체로 유일한 개인 군주를 제시한다. 여기서 군주는 유일한 집단성을 상징할 뿐이므로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위한 지식인 관료집단이 필요하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자신의 견해를 본질적인 것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국가에 관해 말할 수는 있지만, 국가가 곧 정치는 아니며 어떤 이론도 본질적이지는 않다. 근대철학은 정치적인 것과 국가를 분리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가 보는 국가는 정치적 문제에서 경제적 문제로 이행한다. 헤겔이 주장한 통일성이 허구적이라고 본 마르크스는 국가가 지배계급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137, 13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