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인 것의 슬픔》 2. 서사와 이데올로기 이 책의 초반부에는 중국학 연구자인 저자가 느끼는 서구 학문에 대한 열등감과 중국학의 존속 여부에 대한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었다. 중반부에 들어서면 여기에 ‘제국’을 추구하는 중국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감이 더해진다. 대상과 각도가 변경되었을 뿐 열등감과 두려움이라는 정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시기는 1996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지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마도 저자가 느끼는 정서는 1990년대 중반 한국인들에게 낯선 이야기는 아니었을 테다. 한편으로 30년 가까이 지난 시점 한국인들은 이런 정서에 공감할 수 있을까. K-컬처가 전 세계에 유행하는 2020년대, 유례없는 중국혐오의 시대를 맞이한 대한민국에서 중국에 대한 열등감과 두려움이라니! 펄쩍 뛸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이라는 낡은 열망에 대한 훈계 섞인 질타 속에는 어딘가 비틀린 열등감의 냄새가 흐른다. 저자는 근대의 민족국가를 표방하는 현대 중국이 고대 중국의 영토와 역사를 소급하여 자기화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 현상에서 문화적 제국주의를 감지하기도 한다. 중원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고대 중국의 역사는 주변부의 역사를 흡수하는 동시에 타자화한다. 저자는 이를 ‘동양권 내부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라고 정의하며, 이 ‘억압의 중층 구조’를 한국의 동양학자들이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75쪽) 오리엔탈리즘을 자연스럽게 ‘억압’과 연결하는 단순한 태도도 문제이지만, 중국의 관방 중심 역사 서술에 대항하기 위해 ‘국사’ 인식을 내세우는 지점에는 더욱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특히 중국 신화의 중원 중심 기원론에 대응하여 도교의 고구려 기원설을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K-컬처의 인기로 자존감을 채운 현대 한국인에게는 도교도, 고구려도, 산해경 속 신화도 꼭 ‘우리 것’일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역사를 탈중심화하며 기원을 문제 삼는 저자의 태도는 어느새 새로운 기원을 내세우며 몰입하는 지경에 이른다. 물론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논의가 ‘자문화중심주의’로 귀결되어선 안 된다고 부연하지만, 때늦은 변명에 불과하다.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민족’과 ‘국가’라는 애매한 틀에 가두어버린다. 그 틀에 갇힌 저자는 역사를 탈중심화하려는 시도 속에 다시 기원으로 돌아가 국가 중심 역사에 매몰된다. 그 매몰의 현장에서는 ‘고대 한국’이라는 이상한 단어가 발굴된다. 현대 중국이 고대 중국의 역사를 소급하듯 현대 한국은 고대 한국의 역사를 소급하려 한다. 저자의 말대로 중국의 국가 중심 역사 서술이 제국주의화의 문제라면, 한국의 국가 중심 역사 서술은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재해석을 가능하게 할 방법으로 타당한가. 과연 발해나 고구려의 역사가 ‘고대 한국’의 역사로 편입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신화에는 과연 국적이 있을까? 저자의 입장에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나는 저자가 설명하는 고구려 고분과 도교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재미있게 읽었다. 신화학자로서 저자가 보여주는 과감한 상상력과 다양한 자료에 매료되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친근하게 느끼는 신선이나 곤륜산, 용 같은 존재에 과연 국적이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이 존재들은 나에게 중국 문화의 일부도 아니었고, ‘고대 한국’에서 기원했기에 친근해진 존재도 아니었다. ‘nation’이라는 단어는 민족, 국가, 국민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그만큼 민족이나 국민, 국가라는 개념의 기원도 애매하고,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우리가 기원을 찾아 들어가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런 일들이다. 우리가 신봉하던 기원이 얼마나 부실하고 허약한지를 깨닫는 일. 그러니 무수한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뭉쳐 살아온 오래된 서사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좁혀 부르고 다시 그 역사를 국가의 소유로 만드는 일은 얼마나 허망한가.
누군가는 ‘nation’이라는 단어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자신들과 다른 이교도를 칭할 때 쓰던 고대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국가나 민족의 존재는 언제나 경계 혹은 외부에서 쉽게 감지된다. 경계나 외부는 내부에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내부의 존재가 되기 위해 고대의 서사나 신화마저 소급하여 ‘nation’의 경계 안에 두려고 할 때, 주체가 되려고 떠난 여정에서 우리는 결국 이방인이 되어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