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 혹은 열등감
순수한 배움이란 없다. 누군가는 앎 자체의 숭고함을 이야기하겠지만 그것 역시 좀 많이 꾸며낸 말이다. 모든 배움은 선망에서 출발한다. 책이건 지식인이건, 혹은 지식 그 자체 건. 따라서 지식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당연하며, 누군가 지식인이라는 이를 흠모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아는 것을 떠벌리고 싶어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앎(知)이란 입에서(口) 마치 화살같이(矢) 날아가는 말을 동반한다. ' 아! 나 그거 알아!!'
선망이 지나치면 우상을 세우게 된다. 어느 것에도 더럽혀질 수 없는 깨끗하고 순전한 것으로 여기곤 한다. 그렇게 텍스트는 경전이 되며, 지식인은 사제司祭가 되어 버린다. 그 말씀을 곱씹고,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이 배움의 전부라고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빗겨 나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 문자를 사랑하고 지식을 흠모하는 이들은 여기에 머문다. 제 길을 찾아 나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철학과를 진학하고 놀란 것이 있다. 우선, 지나치게 무거운 공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 자유분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대학원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했겠지만, 지식에 대한 태도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생각하면 경건함. 그것이 답답한 공기의 정체였던 듯하다. 교수에 대해서건, 텍스트에 대해서건, 지식에 대해서건. 동양철학을 전공했는데, 거기에도 예외 없이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좀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지금도 경서經書(말 그대로 '경서'!)를 읽을 때 현토를 붙여야 한다며 고집스레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비록 축자영감설 처럼 하나님의 영감으로 글을 남겼다 주장하지는 않지만, 성인께서 남기신 글을 일획도 잘못 읽으면 안 된다 주장한다. 그것도 현토까지 또박또박. 그 반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르겠다. 현토를 붙여 읽어야, 그것만이 제대로 읽는 방법이라 주장하는 이들을 보면 싸우기 전에 현기증부터 난다.
그래도 나 역시 선망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시간이 있으면 옛 글을 그대로 베껴 쓰고, 달달 외고, 스스로 표점도 찍어가며 익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고문古文, 낡은 글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읽노라면 뭔가 좀 다른 존재가 된 듯하다. '고인도 날 못 뵈고, 나도 고인을 못 뵈나'... 그렇게 꾸역꾸역 읽어왔지만 언제부턴가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부도수표가 되었다는 게 맞는 말일 테다.
무엇보다 돈이 되지 않는다. 옛 글을 익히느라 책값도 별로 들지는 않았지만, 두 번 세 번 달달 읽으면 되었지만 그래도 끼니때마다 배고픔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책임감 있는 가장'이 되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까닭도 있다. 어쨌든 내가 선망하는 지식은 시장에서 별로 환대받지 못하는 상품이다. 한때는 내 실력을 자책했지만, 능력이 배가 된들 큰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지식이란 무용하다. 앎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당면한 현실이 만만하거나, 생각보다 배포가 큰 인물이거나, 배움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지식이건 철학이건 다 싸잡아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냥 내 이야기를 하자. 내가 익힌 지식의 태반은 쓸모가 없다. 세상을 해석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낡은 언어는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 암호처럼 오갈 뿐이다. '터무니없이 청백을 훼오려는고....?'라고 해보았자 아무런 대꾸도 들을 수 없다.
처음 플라톤의 <국가>를 펼친 것은 열등감 때문이었다. 철학과를 나왔으면 이런 건 좀 읽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이번에 모 고등학교 인문학 강의를 맡으면서 이 책을 선택한 이유도 비슷했다. 이런 걸 좀 읽어야 어디서 책 좀 읽었다고 으스댈 수 있으니까. 실제로 첫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가능하면 책을 들고 다닐 것. 표지가 잘 보이도록. 무겁다며 가방에 넣지 말자. 왜? 자랑해야 하니까. 선망 혹은 열등감을 인정한다면 이렇게 의외의 쓸모라도 발견할 일이다.
강의자료를 써야 했는데, 처음에는 무엇을 쓰는 것이 두렵기만 했다. 옳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고, 내가 이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조심스러움도 있었다. 누군가 이를 보고 뭐라 하면 어떻게 하나 하며 지레 겁먹었던 까닭도 있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총 10권으로 되어 있는 책을 총 10주에 걸쳐 읽기로 했고, 매주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쓰다 보니 나중에는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식으로 마음이 들더라. 선망이건 열등감이건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섰던 까닭도 있지만 의외로 부아가 치밀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제대로 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무어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따져보니 내가 숭상하는 텍스트 <논어>니 <장자>니 하는 책들은 그렇게도 멋대로 읽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학 교수건 지식인 입네 하는 자들 이건 제대로 읽어볼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훑어보고는 그냥 멋대로 이야기를 내뱉지 않던가. 나도 그냥 제 깜냥대로 말을 내뱉어보기로 하였다.
조심스러움을 놓아버린 데는 이렇게 쓴들 누가 읽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기도 하다. 제 아무리 끙끙대며 글을 쓰고,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누가 그걸 신경 써주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세상에 내놓아도 몇 사람 읽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못 하는 벙어리가 되느니 흰소리라도 지껄여보기로 하였다.
결국 다 나를 위한 글이다. 10주간 글을 쓰고, 갈무리해둔 것은 다 나를 위한 일에 불과하다.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두꺼운 책을 두고 나름 끙끙대며 씨름한 흔적이기도 하고, 내 밑천으로 삼아볼 요량으로 한번 끄적여본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반가운 일이다. 다만 두서가 없고, 친절하지 않아 직접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글을 읽어도 영 공감하기 힘든 내용이 있지 않을까 한다. 더 친절한 글로 다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또 나중의 이야기.
플라톤-소크라테스의 말과 글을 읽으며 저들의 사유가 누구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는 똑똑히 알겠다. 천상을 꿈꾸는, 진리의 사다리를 놓는, 믿음의 철옹성을 쌓는 이들에게 <국가>는 또 하나의 경전과도 같은 글이겠다. 그런 까닭에 매번 꽤 비판적으로 보았다.
여튼 이렇게 정리하고 다음 연을 기약할 뿐이다. 일단 이렇게 쉼표든 마침표든 찍고 저장.
** 10권 내용을 정리한 글은 각각 아래와 같습니다. ** 1. 정의란 무엇인가 https://brunch.co.kr/@zziraci/308 2. 국가라는 커다란 글자 https://brunch.co.kr/@zziraci/312 3. 아름다운 나라로 https://brunch.co.kr/@zziraci/313 4. 네 꼬라지를 알라 https://brunch.co.kr/@zziraci/315 5. 지식 공유는 안 되나요? https://brunch.co.kr/@zziraci/322 6. 철학자는 왜 왕이 되어야 하는가? https://brunch.co.kr/@zziraci/324 7. 철학자와 돼지 https://brunch.co.kr/@zziraci/325 8. 괴물의 탄생 https://brunch.co.kr/@zziraci/326 9. 행복의 나라로 https://brunch.co.kr/@zziraci/326 10. 철학과 시는 사이가 나빠 https://brunch.co.kr/@zziraci/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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