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을 넘어
2019 에세이/ 시사세미나/ 삼월
1. 정치적 올바름, 무엇이 문제인가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소수자들을 차별, 배제하는 언어 사용 및 표현을 지양하자는 신념, 혹은 그에 기반을 둔 사회운동, 흔히 PC라고 줄여 부른다. 예를 들어 ‘불구자’ 대신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에스키모’ 대신 ‘이누피아크’, ‘후진국’ 대신 ‘개발도상국’, ‘애완동물’ 대신 ‘반려동물’, ‘결손가정’ 대신 ‘한부모 가족’ 등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 ‘정치적 올바름’은 단순한 언어순화 운동 차원을 넘어서, 영상이나 게임 등에서의 균등한 역할 배분, 혹은 진학이나 취업, 승진 등에서의 소수자 우대 정책 등으로 확장 적용되고 있다. 성별, 인종 등 여러 집단적 정체성이 합류하는 정치적인 상황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이른바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 일체를 뜻한다. 하지만 이는 부자연스럽고 억압적이며 역차별이라는 비판이 있으며, 복잡한 정치적·사회적 현실과 맞물려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책 소개 중에서
얼마 전부터 ‘정치적 올바름’(PC)은 자칭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진보는 더 이상 좌파나 맑시즘 같은 단어와 동의어가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진보’라는 개념 자체의 변화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그 실감이 지나치게 강력한 나머지 어떤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에서 일찌감치 교조주의의 냄새를 맡는다. 우려를 떨치지 못하면서도 ‘정치적 올바름’이 가져오는 사회의 변화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정치적 올바름’에 주목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이 무엇이며, ‘정치적 올바름’이 왜 문제인지를 알아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문제 삼는 이들은 많다. 누군가는 ‘정치적 올바름’의 스타일 자체를 문제 삼는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이들은 자주 올바름을 무지와 대립시키며,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교화하고 계몽하려 든다. 이런 방식은 자주 반감을 불러일으키며 논란이 된다. 전략 측면에서도 역효과를 일으킬 만큼 허술한 방식이다. 누군가에게 특정 단어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면서 자신의 말이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주장할 때, 포용과 다양성은 오히려 지연된다는 우려가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이라고 이해하면 사회적 약자를 대상화하고 주체성을 부정하는 관점이 될 수 있다. 타인을 계몽하겠다는 입장과 타인을 대변할 수 있다는 입장은 자주 함께 나타난다. 스스로가 타인을 계몽하고 대변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일은 위험하다. 자칫 타인의 변화가능성을 부정하고, 타인의 입장을 함부로 예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계몽해야 할 대상과 대변해야 할 대상이 같을 수도 있다. 혐오발언을 하여 계몽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바로 사회적 약자일 때도 많다.
2. 정치적 올바름을 넘어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의 시 <나, 살아남은 자>의 전문이다. 우리 모두는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며, 정치인과 재벌의 무능과 적폐를 방관하거나 도왔던 이들이다. 우리 삶에 올바름이 필요하다면 규범으로 주어져서는 안 되며,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 올바른지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올바름에 대한 사유는 우리 자신이 전혀 올바르지 않다는 사실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 시의 제목처럼 우리는 ‘살아남은 자’이며, 그 사실로 인해 자신을 미워하거나 변명하면서 누군가를 파괴할 수도 있는 자이다. 이미 계몽된 자도 아니며, 올바른 자는 더더욱 아니다. 올바름은 누군가가 만들어갈 삶의 방향일수는 있어도, 타인을 단죄하는 도구가 될 수는 없다.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는 ‘정치적 올바름’이 다수자에게서 소수자를 보호한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소수자는 ‘정치적 올바름’을 통해 고정된 정체성으로 길들여지며, 소수자에게서 다수자가 보호된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교양인의 매너로 여기는 이들이 많지만, 이 매너는 사회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규범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후지이 다케시의 의견이다. 누군가가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규범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으며, 그 ‘올바름’에 정해진 기준을 매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올바름’을 내세울 때 논쟁의 장이 되어줄 정치는 사라진다.
후지이 다케시는 우리가 ‘정치적 올바름’에 쉽게 매료되는 이유를, ‘착한 방관자’가 되어 타인과 부대끼지 않으려는 데서 찾는다. 우리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건과 타인들 앞에서 자신을 방관자의 위치에 놓으려 한다. 스스로를 훈수 두는 제3자로 놓고 사건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니면 스스로를 피해자 혹은 약자로 규정하면서 모든 책임을 전가할 사람을 찾는다. 정작 어떤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는 우리에게 무엇이 올바른지를 규정해 줄 사람도 없고, 누구도 완전히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킨 광장의 촛불은 그 시절의 모든 문제를 박근혜 개인에게 돌리며,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책임을 벗어난 이들은 소수자를 대변할 강력한 규범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소환하여 계몽의 낫을 휘두른다. 후지이 다케시의 지적대로 ‘착한 방관자’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정치는 생존의 문제이다. 생존 혹은 정치는 대립 속에서 우리의 차이를 어떻게 다루는지 배우는 일이며, 그 차이를 힘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공부 혹은 배움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바로 갈등 속에서 ‘나’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