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철학, 종교
플라톤 《국가》제7권
자, 이제 교육이다. 완벽한 통치자를 만들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계획은 이제 교육으로 접어들었다. 사슬에 묶인 채 동굴 속에 갇혀 불빛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만 보고 살아온 이들은 실물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 중 누군가 사슬을 끊고 위로 올라가 비로소 태양을 보게 된다면? 소크라테스는 혼의 비약을 이렇게 설명한다. 태양, 온갖 올바른 것과 아름다운 것의 원인이 되는 선의 이데아를 보는 일은 지성에 의해 가능하다. 그럼 지성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진리와 지성을 창조해야 한다. 동굴 속에서 사슬을 끊고 올라가는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이 ‘의견’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신’만이 알고 계신다고 전제한다. 그 ‘신’은 과연 제우스일까.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진리에는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도달할 수 없다.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각자의 진리와 지성을 창조해야 가능하며, 신이 아닌 누구도 그 진리와 지성을 보증해줄 수 없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각자의 방식으로 확보되는 것이지, 보편적인 진리 획득 방식으로는 가르칠 수 없다. 시력이 없는 자에게 '시력을 넣어주듯‘ 지식이 없는 혼에 지식을 넣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교육이란 혼에 지식을 넣는 일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다. 필요한 일은 선을 관조하며 견뎌낼 수 있을 때까지 생성의 세계에서 실재의 세계로 전향을 시키는 일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교육은 이 혼을 전향시키는 기술이다.
그렇다고 교육이 모두를 진리로 이끄는 것도 아니다. 지적 활동이라는 것은 유용하고 유익할 수도 있지만, 무용하고 유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지식이 유용하고 유익하다 말하지 않으며, 교육 없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국가의 건설자로서 소크라테스는 가장 우수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이라고 한 것에 도달하도록 강제하려고 한다. 왜? 국가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국가는 개인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그들을 이용하여 국가를 결속시키려 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국가에서는 이것이 정당한 일이다.
이제 가장 우수한 품성을 지닌 이들을 어릴 때부터 교육시켜 철학과 공무 양쪽에 다 관여할 능력을 갖춘 이들로 키워보자. 아름다움과 정의와 선에 관한 진리를 본 이들은 통치하는 일에 열의를 적게 가지며 훌륭한 통치를 할 것이다. 열의는 적어야 하지만, 그들은 통치하는 일을 필연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국가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 이들은 몇 가지 교과목을 배워야 한다. 바로 산술과 기하학, 천문학이다. 천문학 이전에 3차원의 세계를 설명할 무언가를 더 배워야 하지만, 그 학문의 구성이 아직 미미하므로 일단 천문학으로 건너뛴다. 여기에 모든 교과목의 갓돌로 문답법을 세운다. 교육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바라는 전향의 방향은 확실하다. 생성의 세계에서 존재의 세계로. 생성·소멸하는 세계에서 그렇지 않은 세계로. 육체의 세계에서 혼의 세계로.
재미있는 점 한 가지는 소크라테스가 동굴의 비유 전체를 자신의 ‘의견’(401쪽, 517b)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전에 우리가 지식이라고 통칭하는 것을 몇 단계로 분류했었다. 바로 지식/사고/신념/상상이다. 이 분류는 제7권(434쪽, 534a)에도 다시 등장한다. 네 가지 단계 중 지식/사고는 ‘지성’에 속하고, 신념/상상은 ‘의견’에 속한다. 스스로가 ‘의견’이라고 밝혔으므로, 소크라테스의 동굴 비유 전체가 지식이나 사고가 아닌, 신념이나 상상에 불과하다는 말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논증에 의해 선의 이데아를 다른 모든 것과 구분해 규정할’ 수 있고, 모든 반론을 헤치고 나아가 ‘선의 이데아를 의견이 아닌 존재에 따라 검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묘사한다.(435쪽, 534c)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소크라테스가 갑자기 의견을 지성 혹은 진리로 비약시키고자 할 때마다 기묘한 균열, 쉽게 메울 수 없는 구덩이가 드러난다. 물론 신념이나 상상을 지식이나 사고로 둔갑시키려는 시도는 우리 주위에서도 너무나 비일비재하여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그런 시도가 아주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많은 이들이 그 비약에 응원과 환호를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의견을 지성 혹은 진리로 비약시키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비약의 순간을 칭송하며 모든 이들이 고개를 조아릴 때, 바로 거기가 종교의 집회장소가 될 것이다.
다행히도 철학자의 수호자이자 우두머리인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젊은이들을 늘 주위에 대동하고 다닌다. 말씀을 청하는 이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나 조롱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때도 기꺼이 대화에 응한다. 신념이나 상상은 지식으로 비약하고 싶어 하기 이전에, 이미 스스로가 지식의 요건을 갖추었다는 믿음을 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학문의 이익을 유용함의 측면에서만 판단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시작은 유용함이었을지 몰라도 그 결과는 진리를 향해 가는 것이라고. 그 길은 배울 수 없으며, 자신의 내부에서 선의 이데아를 따라가는 길이다. 누군가 그 길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포착해줄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에게 진리와 신은 동의어이다. 적어도 나는 이 신이 제우스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행히 소크라테스는 종교의 창시자, 혹은 교주가 아니다.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논증하려고 할 뿐,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교주는 아니어도 적어도 선지자쯤은 되겠다. 곧 누군가가 올 거라고 예언하는. 그런 면에서 분명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 사회의 이교도였다.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과는 다른 신을 믿는 이교도. 진정한 철학자들이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는 사회로, 국가의 형상을 조각하는 소크라테스는 훗날의 혁명가와 닮았다. 서구의 철학이 소크라테스(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면, 마르크스를 비롯한 혁명가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서구의 혁명에서 비롯된 근대의 혁명들도 명백하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영향 아래 있다. 제7권의 마지막에서 엿보이는 국가주의의 그림자 역시 그렇다. 국가주의와 종교의 모양새가 왜 그렇게 닮았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게 만드는 부분이다.